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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IVF 2020-06-24 조회9,752회 댓글1건

[D-review]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 오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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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F 하지?  

하나님 믿지? 

안에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없었다. 


코로나로 개강이 미뤄질 때만 해도 내심 좋았다. 학교는 학기 내내 온라인 강의를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코로나는 아무리 밖순이 사람도 집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답하고 외로웠지만 SNS 둘러보면 미칠 같은 사람이 혼자만은 아닌 듯했다. 그래 사실이 헛헛함을 달랠 수는 없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그래도 마음의 거리는 가깝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는 성경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IVF에서 배운 신앙도 이거였다. 혼자 믿는 것이 아니 함께, 세상 곳곳에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심는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로 대부분의 임은 온라인으로 대체되거나 취소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IVF 정신을 놓지 않고자 노력했다. 고통 받는 사람들과 세계를 생각하며 같은 기도문을 보고 함께 기도했다. 온라 세계는 여전히 북적거렸다.

 

그런데 온라인에서 행동의 대부분은 가식적이었다. 그저 습관처럼, 연극처럼 홀리한 말을 뱉어낼 뿐이었다. 건조함을 느끼기 시작하자 온몸이 간지러웠다. IVF 하지? 하나님 믿지? 선교단체까지 정도면 남들이 보기엔 찐기독교인일 텐데 어느덧 안에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랄게 1 없었다. 


DPM 기도문을 올리면서, 리더모임을 마치 기도하면서 생각했다. ‘기도해서 뭐하 ?’ 기우제를 드리면 백발백중 비를 내린다 무당은, 사실 비가 오기 전까지 기우제를 계속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아무리 기도해도 코로나는 점점 퍼지고 있었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먹고 자리를 위협할 인공지능이니 뭐니 해도 세계는 바이러스 앞에 주저앉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는 만큼 장엄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양하는 시편 기자의 믿음이 없었다. 기도의 소망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부활의 놀라움과 기쁨, 다시 오실 예수님의 소망은 습관처럼 들어서 알고 있을 믿지 않았다. 


믿는다는 뭐지? 나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사실 우리가 바보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남들은 없다고 생각하는 신을 있다고 믿는 우습기도 했다. 조금 본질적인 고민이 다가왔다. 신은 존재하는 걸까? 그래, 존재 한다면 나는 신을 믿을 있나? 나는 때문에 하나님을 믿나? 내가 반한 성경의 가치관을 다른 누군가도 주장한다면, 그때도 나에게 기독교는, 하나님은 매력적일까? 

해서는 질문을 해버린 같았다. 나는 하나님과 그의 의를 위해 믿는 아니었다. 사람이 좋았다. 믿음으로 얻은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를 얻기 위한 믿음이었다. 부끄러웠다. 이럴 바에야 내가 먼저 사라지는 정답인 같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모든 생각과 민으로부터. 사라지면 해결될 문제를 살겠다 애쓰느라 사서 고생하는 같았다.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일을 살기 위해 잠을 자야만 하는 싫었다. 


사람들과 말할 때는 고민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힘든 인생이지. 산다는 이런 아닐까. 하지만 넘쳐버린 생각은 언제든 튀어나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GBS 해도 누군가와 통화를 해도 다들 고민이 뭐냐고 묻는 같았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다. 사실 이런 고민을 음도 아니었다. 세상에 대한 불만을, 힘든 사람 투성이인 세상을 구해달라고 하나님을 찾기보다 그를 부정하길 택했다. 모든 종교 적인 미사여구가 역겨웠던 때가 있었다. 


재작년 1. 사촌 언니를 잃었고, 우리는 언니의 장례식을 치르지도 못했다. 때문이었다. 세상은 숨을 쉬는 데에도, 똥을 누는 데에도, 심지어 죽는 데에도 돈이 필요했다. 앞에 하나님 나라는 코웃음을 치게 만드 단어였다. 강의 시간에 배웠던 마르크스 멋있어 보였다. 그가 정답을 쥐고 있는 같았다. 어떤 책은 이웃을 사랑하라 기독교의 사랑이 부패한 사랑이라고 말했다. 드디어 답을 찾은 같았다. 가족, 이웃만 사랑하는 기독교의 허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이 났다. 나는 책에서 본대로 말벌과 패랭이꽃의 사랑을 주장했다. 우리가 서로 같아서가 아니라 서로 달라서 사랑한다면, 세상에 사랑하지 못할 자가 없었다. 


그런데 간사님이 네가 말하는 사랑이 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고 했다. 이웃은 옆집 사람이 아니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였다. 우리 지부에 있는 내가 이해할 없는 친구였다. 


부자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경은 사자를 죽여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어노는 세상을 그리고 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를 비판하던 목소리는 그들만의 시선으로 기독교를 오해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비판하는 그들의 주장이 갑자기 허술해 보였 . 내가 바라던 세상은 이미 생각보다 놀랍고 정교하게 계획되었고,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사실 외롭고 막막했다. 아무리 더러운 세상을 무너뜨리고 싶어도 내가 없는 일이란 알았다. 많은 유토피아 주장했던 학자들조차도 끝내 만들지 못한 세상이었다. 


글을 쓰다 보니, 또다시 성경에 설득되기 시작한다. IVF 하지. 부정할 없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있도록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이 있어서. 기쁨을 다른 누군가도 느낄 있다면 좋을 텐데. 


나의 고민과 의심을, 식어버린 열정을 지난 기억으로 메우는 가장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했다. 없어서 낡은 기억에 기대냐 하는 심보였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알겠. 나는 기억으로 이뤄진 사람이구나. 억을 부정한다는 나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구나. 


우리는 기억으로 산다. 좋았던 경험을 추억 하며 지금을 달래고, 끔찍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기억하며 사는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다. 이루게 하는 고민을 숨길 있었던 치열하게 고민했던 그때의 기억 덕분이었다. 비록 지금 나는 성숙해지기보다 오히려 기억에 숨어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때의 결론과 지금 고민의 끝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 


그래. 나는 기억으로 사는 사람이다. 역시 기억들로 채워버렸다. 글을 쓰면서 다짐한다. 기억으로 도망치는 것에서 벗어나 읽고 묻고 따져보자고. 기억으로 살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지는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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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꿍이님의 댓글

까꿍이 작성일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마치 레이첼 헬드 에반스의 글을 읽는 것 같네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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