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소리>는 ‘수준 높은 수다로 꼬드기고 등 떠미는’ IVF 학사회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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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2-01-17 조회5,939회 댓글0건

[소리정음]
내게 찾아와 삶이 되어준 나음누리 [체험 삶의 현장Ⅷ 나음누리 학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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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소리] 2022 여섯 번째 소리 12+01호(통권259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체험, 삶의 현장 Ⅷ]

- 나음누리 학사회 - 


▶ 내게 찾아와 삶이 되어준 나음누리 _ 강애림

▷ 나에게 '나음누리 서울대병원 지역모임'이란? _ 한혜주 

▷ 가족을 살리는 나음누리 공동체 _ 송원정 

▷ 나음누리 수련회의 어제와 오늘 _ 강의혁 

▷ 나음누리의 역사와 사역을 돌아보며 _ 정성구 




"체험, 삶의 현장"을 이어온지 8년 째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부산, 전북, 춘천, 제 주, 충남, 경인 등 방방곡곡을 찾아가 지방의 학사들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작년에는 해외에 있는 학사님들의 이야기도 들어보았는데요, 올해는 한 지역이 아니라 전국(아산병원·강동, 서울대병원, 수원·용인·화성, 평촌, 강서·경인·부천, 원주, 대구, 부산, 광주)에서 모임을 이어가고 있는 의료인 공동체 '나음누리'를 만났습니다. 

개인 또는 가족 단위로 호흡처럼 함께하는 나음누리er들의 삶 이야기, 그리고 조금 특별했던 축제와 수련회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내게 찾아와 삶이 되어준 나음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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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원'에서 전공의로 살아가고 있는 필자

 
                                                                                                                                                                                             


◆ 강애림 (서울대99)

서울대 간호학과를 나와 경북대 의학전문대 학원을 졸업했다. 

도서관 앞, IVF 책 소개하는 코너에서 만난 친구를 따라 긴 설교를 자랑하는 LGM에 갔다가, “바로 여기다”하고 IVF 에 쭉 눌러앉았다. 

지금은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살림의원’에서 동네 주치의로서 살고 있다. (병원에서는 강옥림으로 불린다.) 



‘간호사’에서 ‘간사’로, 그리고 다시 ‘전문의’로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맨날 같이 놀던 옆집 오빠네 집에는 하얀색 표지의 위인전이 책장 가득 꽂혀 있었습니다. 그 집에 놀러 갈 때마다 한두 권씩 읽고 돌아왔는데 그중에서도 나이팅게일이나 슈바이처 박사의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익숙한 곳과 가족들을 떠나서 전쟁터나 아프리카로 가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한 위인들의 삶이 가치 있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제 꿈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간호학과에 입학한 저는 IVF에서 가르쳐준 '하나님 나라'에 매료되어, 삶터와 일터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꿈을 꾸는 멋진 소망을 가지고 한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무섭고 치열했습니다. 생과 사가 오가는 의료 현장에서는 한 사람의 실수가 자칫 생명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간호사 교육은 그동안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을 만큼 혹독했습니다. 간호사의 ‘태움’ 은 저에게도 예외가 없었고, 매일 선배들의 눈치를 보고, 하는 일마다 지적을 당했으며, 때로는 폭언까지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어두움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시간이 흘러 어느덧 그 시간이 좀 더 견딜 만해지고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훈련받고 속해 있던 지방회에서 캠퍼스 간사로서의 삶을 살아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렵게 겨우 익숙해진 곳을 떠나 변화를 요청하시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모험을 감행해보기로 했습니다. 안전과 모험을 선택하는 삶에서 될 수 있으면 모험을 감행하는 삶을 살리라 캠퍼스 시절에 결심했으니, 이제 삶으로 살아보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환자들 의 육체적 고통과 죽음의 문턱 앞에서 인공호흡기, 투석기, 수많은 수액, 계속 울려대는 알람과 같은 위급한 상황을 대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찬양과 기도를 인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비전을 나누고, 공동체를 향한 비전을 말하고 세워가는 삶으로의 대전환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혹독한 부담에 짓눌려 매일 밤 기도하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수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간사로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조금 익숙해져 가던 중, 저는 지부 간사로서 학생들을 이끌고 캄보디아 선교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황무지와 같은 캄보디아 시골 마을을 다니면서 그곳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 번도 병원에 가보지 못 하고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상인 삶이었지만, 저는 그 상황에서 다시 의료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동료 간사님들께 전하고 간사 1차 임기를 마무리했습니다. 저는 간호사로 돌아가지 않고 의학전문대학원 입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린 공부 습관을 다시 세우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오래 앉아 있기에 성공하여 10년 만에 다시 입시를 치르고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4년의 의전원, 1년의 인턴 3년의 가정의학과 수련과정을 마치고 가정의학과 전문의 2년차를 지나고 있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니 1999년부터 2021년까지 22년간 간호학과 학생부터 간호사로, 의대 간호대를 섬기는 간사로, 의전원 학생에서 전공의를 거쳐 전문의까지, 20여 년을 의료인으로 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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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진행하는 나음누리 기도회 '나누기'
(필자는 가운데 줄 아래에서 두 번째)


호흡처럼 다가온 나음누리


간호대 2학년 때, “지방회 수련회 외에도 나음누리 수련회까지 가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에 (방학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불만이 가득했던 때가 기억납니다. 짜임새가 확실하고 촘촘하고 수련회 다운 지방회 수련회와 허름하고 허술한 나음누리 수련회를 계속 비교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꾸역꾸역 참석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한 해라도 거르면 나음누리가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내 때에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교대 간호사가 되어서는 지방회 학사 모임을 가기도 어렵고 그렇게 끈끈하던 교회공동체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매번 힘들어서 울고 싶은 심정을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모임에는 더더구나 가기 싫었습니다.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곳은 같은 병원, 같은 공간에 나와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간호사, 전공의와 소소하게 나누는 나음누리 모임이었습니다. 다 힘들고 어려웠기에 학생 때 그렇게 부르짖었던 ‘의료사회 하나님 나라’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과연 이 시간이 끝날 것인가 하는 한숨으로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철벽같이 굳건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모임 때 우리를 찾아와주신 간사 님의 말씀이 그저 무뎌진 영혼을 간신히 깨울 뿐이었습니다. 


당시 전국 각 병원에 흩어져 있던 모임들은 ‘이러다 이 모임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와 ‘아무래도 의료사회 하나님 나라는 안 될 것 같다’는 패배의식을 내재한 채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나둘 병원 모임이 사라져갔습니다. 


지방회 캠퍼스 간사가 되었을 때 나음누리는 더 어려워 보였습니다. 전국의 의대가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변화하는 시점에서 더 이상 의대생들이 IVF에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명맥을 이어 가던 나음누리의 ‘대’가 끊어질 것 같은 불안함이 엄습했습니다. 당시 나음누리 간사님과 나음누리를 사랑하는 학사님들은 의대생들을 직접 만나러 캠퍼스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공중보건의를 하고 있는 나음누리 학사님들(김형규 학사님, 최영민 학사님, 설기호 학사님, 강의혁 학사님)이 광주, 대구,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의대, 간호대 학생들을 만나고, 이들을 나음누리 학사님들과 만날 수 있게 하고, 지방회에서 최대한 훈련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마저도 간사님이 안 계시는 지역에 있는 학생들을 위해서 나음누리 학생 수련회를 마련하고, 소박하지만 간절한 마 음으로 그들을 품고 기도하고 동역하면서 학생 사역들을 세워왔습니다. 학생들이 훈련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학사님들은 수련회비와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수련회장인 대전으로 모이는 학생들의 왕복 차비를 지원하고 간식을 후원하면서, 함께 그 시간을 견디며 지금까지 나음누리를 지켜왔습니다.


현재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던 나음누리는 코로나 상황을 맞이하면서 줌모임을 활성화했습니다. 거리의 한계로 모이지 못하고 참여하지 못했던 학사님들이 공간을 초월하여 모임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오히려 나음누리는 온라인 모임 이후 서로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은 사역의 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끝나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계속 만나게 될 거 같습니다. 


저는 캠퍼스를 지원하던 간사에서 다시 의대생이 되어 이미 앞서가신 선배 학사님들의 삶을 지켜 보는 후배가 되었습니다. 의료 현장에서 분투하며 신앙을 지키고 공동체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애쓰는 선배님들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더 커졌습니다. 나음누리는 의료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IVF라면 평생을 함께 걸어가야 할 동역자이기에, 앞서 걸어가는 선배님들의 모습은 후배들에게 이 세상을 마주할 큰 용기와 도전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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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온라인 수련회 이후 의료문제를 토론하는 소그룹 '살롱 지'
 


살림의원을 만나 동네 주치의로 살며


전문의 수련과정을 마치고 저는 커리어에 도움이 되고 적절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로컬병원에서의 현실은 제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일에 대한 보람보다는 한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저 자신이 완전히 소진되고 있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던 중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을 알게 되었고, 올해부터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일반적인 1차 진료를 하면서도, 그 지역 주치의로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공공 의료(장애인, 의료수급자, 성소수자, 학대받은 여성 등)를 적극적으로 펼치는 병원입니다. 왕진 요청이 있으면 환자들의 집으로 찾아가 진료를 하기도 합니다. 제가 일하는 병원은 조합원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병원이라 한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느낌이 덜합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 행정직의 모든 사람이 함께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힘들지만 재밌게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은 다른 형태의 병원에 서 일하게 된 것은 먼저 그런 고민을 하면서 앞서 걸어가신 나음누리 선배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덕분에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의료 현장에서 동료들을 사랑하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며, 내가 받은 ‘태움’이나 ‘부당함’을 후배에게 물려주지 않기로 결단하며, 제약회사의 리베이트와 타협하지 않으며, 환자들에게 가장 해가 되지 않은 선택을 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환자들을 위한 불편함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더 나아가 한국사회 의료사회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나음누리가 되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제 삶을 건강하게 지켜주었던 나음누리가 이제 그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 푸르른 잎이 가득하여, 그 아래에서 많은 후배들이 꿈을 꾸게 되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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