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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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2-04-28 조회5,065회 댓글0건

[소리정음]
우리 가족의 챕터 캠프[송구영신(送舊迎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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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소리] 2022 첫 번째 소리 02+03호(통권260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 


  한 해를 잘 계획하는 법에 관하여 _ 홍헌영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통과 의례 _ 전소라

  내가 주님과, 주님이 나와 함께하는 시간 _ 김현숙

  우리 가족의 챕터캠프 _ 유지은

 코로나 시대 간사의 삶, 다시 돌아온 한 해 _ 김주완





우리 가족의 챕터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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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공동체, 가족들과 함께 (필자는 맨 왼쪽)
                                                                                                                                                                                              


◆ 유지은(숙명여대93)

K-pop을 좋아하는 딸 강은(고2), 클래식을 좋아하는 아들 강율(초4), 

‘드라마 보는 남자’로 활동했던 남편 서명진(서강대93), 깨물기 좋아하는 고양이 레오(6살)와 함께사는 영화감독 파주맘입니다.  




나는 챕터캠프를 참 좋아했다. 한여름과 한겨울, 호젓한 숙소를 빌려 거실에 둘러앉아 밤새도록 치열하게 공동체 얘기를 나눌 때면, 우리가 꿈꾸는 캠퍼스 복음화가 눈앞에 와있는 것처럼 뜨겁고 생생했다. 수십 년이 지나 오랜만에 챕터캠프라는 단어도 입에 올리며 전공보다 더 전공 같았던 IVF 시절을 얘기할 때면, 의외로 챕터캠프를 싫어한 지체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생각해 보면 몇몇 열정적인 지체의 침 튀는 논쟁과 반성적 비판과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대화가 모든 지체들에게 다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 같다. 회의를 싫어하는 지체들도, 현실적이지 못한 뜬 구름 잡는 이야기를 답답해하는 지체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나간 이야기를 꼬치꼬치 되짚어가며 반성하는 시간이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런 지체들의 입장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회의에 온전히 몰입하여 자기성찰과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일에 흥분해 밤잠을 잊곤 하는 ENFP 타입 중 하나가, 바로 나다.


이번 글을 맡고, ‘POGS’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요즘도 캠퍼스에서 POGS를 짜는지 모르겠다. Purpose-Object-Goal-Standard에 맞춰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부터 실천사항까지를 세우는 것인데, 나는 졸업하고도 한동안 개인적으로 POGS를 짰던 것 같다. 정확히는 20대까지 나의 인생의 Purpose는 ‘캠퍼스의 복음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간사로 사역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내 인생 최초로 나를 사로잡았던 삶의 목적이 곧 공동체의 비전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 이상을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나의 인생길의 고통이었다. 세상에서는 그 목적에 부합하여 사는 게 어울리지 않았다. 나의 몸은 이미 캠퍼스를 떠났고 함께 목적을 추구할 공동체가 없었으며 세상 속에 홀로 던져졌는데, 가진 것이라곤 ‘캠퍼스의 복음화’를 향해 모든 초점을 맞추고 삶을 조정하던 습관뿐이었다. 전쟁에서 제대한 군인의 심정이 이와 비슷할까. 나는 한동안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아프게 사회에 적응해 나갔다. 30대의 삶은 외롭고 춥고 배고팠다. 내 깊숙한 곳에 묻어 둔 공동체의 습관과 생각과 마인드를 강박적으로 벗겨냈다. 서울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출근하는 긴 지하철 안에서 시심을 붙들고 그날의 말씀 한 줄 한 줄을 생명줄 같이 부여잡았다. 새로운 전쟁터로 향하는 길에 매일매일의 ‘Standard’는 주어졌는데, 목표도 목적도 알 수 없는 발걸음을 꾸역꾸역 살아내야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넘어지고 쓰러지고 벽을 더듬으며 건너왔다.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제 빼박 중년도 지나 노년을 바라봐야 하는 오십이 다 되어서야 지나간 시간도 추억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의 여유 가 생겼다.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긴 세월이 갑자기 POGS란 단어와 함께 소환되고 말았다. POGS 없이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3~40대의 애환 말이다.


몇 년 전부터 우리 가족의 연말 의식 같은 것이 생겼다. 교회에서 가깝게 지내는 가정이 연말마다 숙소를 잡아서 가족 워크숍을 한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인 것 같다. 그 가정은 남편은 회사를 운영하고 아내도 계획한 대로 꼼꼼히 실천하는 계획형의 부부이다. 게다가 자녀들도 거기에 길들어 가정의 비전 안에서 안정적으로 잘 자라는 모범적인 가정이다. 그 가정의 워크숍은 이렇다. 오전에는 남편이 준비한 시트를 가지고 각자 일 년의 삶을 돌아보고 반추하고 새해를 계획하는 에세이를 적는다. 그후, 오후에 다시 모여 적은 것을 발표하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챕터캠프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매우 신선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 가정을 따라가기에는 우리 가정은 참으로 산만하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계획한 것을 절대 실천하지 못하는 가정이지만, 우리 가족의 색깔을 담은 챕터캠프를 갖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2017년 12월 31일 밤, 가족끼리의 조촐한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노트를 꺼내 그해 우리 가족의 사건을 적어 보았다. 그때는 임시로 좁은 옥탑방 같은 집에 이사해서 살던 때였다. ‘이사’가 첫 번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 좁은 집에 한 명의 식구를 더 들이게 되었는데, 바로 반려묘 레오였다. ‘레오 입양’이 두 번째 사건이었다. 당시 딸은 한참 사춘기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성실하게 해오던 피아노 학원을 끊겠다고 돌연 선언한 것이 세 번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자기 스스로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구별하던 시기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틈틈이 국내 곳곳의 섬들을 여행한 기록도 적다 보니 10대 뉴스쯤 될 것 같았던 한 해의 사건이 20대 뉴스를 뽑아도 부족했다. 아들이 화상 당한 아찔한 일, 극적으로 병설 유치원에 자리가 나서 다니게 된 일, 레고에 입덕해서 수십 점의 레고 작품을 완성했던 사진, 하나 하나 떠올리다 보니 아들이 한 해 동안 많이 성장한 것과 엄마 아빠가 일하는 동안에도 지켜 주신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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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도에 적어보았던 우리 가족의 사건들
 


이렇게 시작한 노트를 올해로 5년째 쓰고 있다. 그해 뉴스에 이어 다음해에 소망하는 바를 각각 적는다. 그 부분에서 잠시 10년 후를 내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10년 후 내가 어떤 모습이 되길 원하는지 각자 나눈 후,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내년 한 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세부 목표를 정해보는 것이다. 첫해에는 10년 후인 2028년에 ‘돈 잘 벌기, 내 집 마련하기, 교수 되기’ 같은 다소 세속적인 목표들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돈 잘 벌기를 소망했던 딸은 그다음 해에는 ‘행복하기, 방탄을 직접 보기’ 같은 소박한 소망을 적었다. 다음 해가 지나고 한해를 돌아보면서 “방탄도 직접 만나 소원이 이루어졌다”라며 만족하며 감사했던 기억도 난다. 올해 딸이 적은 2032년의 소망은 ‘안정된 직장’이다. 돈 잘 벌고 싶은 소망에서 안정된 직장을 소망하기까지, 꿈도 여러 번 바뀌고 고민도 많았다. 이제 고2가 되면서 진로를 타협하게 되는 것이 수순이기도 하고, 사회로 나갈 고민을 하는 젊은이들의 꿈이 점차 조정되는 과정을 보는 것 같은 씁쓸함도 없지 않다. 하지만, 딸은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덧붙였다. 아마 내년에는 또 바뀌어 있을 것이다. 안정된 직장도 좋지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점차 영글어져 갔으면 좋겠다. 아들은 뜬금없이 21살이 될 자신이 ‘군대에서 살아남기’가 소망이라고 말한다. 유튜브 같은 곳에서 군대에 대한 얘기를 듣곤 하나 보다. “그때쯤에는 군대가 꼭 살아남아야 하는 곳만은 아닐 거야”라고 남편이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곁에 있던 누나가 “좀 더 발전적인 소망을 한번 가져 보라”고 조언한다. 다음에는 서로에게 소망하는 바를 적는다. 처음에는 ‘딸이 행복하길, 중학교 생활 잘 하길’ 같은 풋풋한 소망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다 보니 그 시간이 서로에게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성토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올해는 아들, 딸이 서로가 서로에게 인터넷과 핸드폰 보는 시간 좀 줄이라고 충고하는 풍경이 벌어졌다. 엄마에게는 ‘화 줄이기’, 아빠에게는 ‘리액션 잘하기’ 같은 항목이 단골 메뉴이다. 


이 시간에 가족 각자의 한 해 명장면도 선정한다. 아들은 2021년의 명장면으로 피아노 급수시험에서 피아노 치기 전 엄청나게 긴장한 순간을 뽑았다. 그리고 피아노 4급을 합격한 것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두려움을 이기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였기 때문인 것 같다. 딸은 기독교 학교인 교내에서 매주 열리는 기도회의 한 장면을 뽑았다. 딸이 학교에서 모임과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 만나기를 매주 기도했던 우리 부부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신 순간이 딸에게도 명장면으로 남았던 것 같다.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빠는 회사에서 어려운 프로젝트의 돌파구를 마련하여 해결해 낸 순간을, 나는 영화 촬영하기까지 힘들었던 시간 끝에 드디어 크랭크인 하던 순간을 명장면으로 뽑았다. 명장면을 뽑고 나니 정말 한 해가 영화처럼 극적으로 흘러온 것 같다. 


올해는 특별히 ‘2021년을 보내며 새해를 맞는 노래’를 각각 선정했다. K-pop 박사답게 딸은 올 한 해를 빛낸 K-pop으로 에스파의 ‘Next level’을 뽑았다. 딸 덕분에 매주 기숙사를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K-pop 최신곡을 학습하는 우리는, 다시 한번 익숙한 히트곡을 함께 들으며 몸을 흔들었다. 클래식을 두루 섭렵하는 아들의 선곡은 리스트의 ‘파가니니 에튀드 4A’라는 곡이었다. 밝고 활기찬 선율이 새해를 맞이하기에 어울리는 곡이라는 설명과 함께 고상한 태도로 에튀드를 감상했다. 엄마의 선곡은 뜨거웠던 한 해를 보내며 토이의 ‘뜨거운 안녕’을 싸이-성시경 버전으로 들었다. 방송일에 고등학교 수업에 영화 촬영에 박사 과정까지 밟으며 (제일 소홀했지만) 살림까지 감당했던, 그야말로 뜨거웠던 한 해도 이젠 안녕~. 아빠는 애니메이션 <원피스> 주제가인 코요테의 ‘우리의 꿈’을 들려주었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고 용기를 내. 넌 할 수 있어’ 이 부분의 가사를 읊어 주었다. 


나는 3~40대를 지나면서 더 이상 공동체의 꿈은 내게 없을 것이라 단념했다. 공동체의 비전이니 이상은 뭣 모를 때나 꿈꾸던 것이라고 점차 나를 설득하는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긴 터널 끝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디선가 본 듯한 작은 공동체, 언젠가 꿈꾸었던 것 같은 세상 속의 작은 교회, 산 위의 마을, 그것이 다름 아닌 우리 가족이었다. 첫째와 둘째의 터울이 커서 우리 가족이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는 날이 좀 뒤늦게 왔는데, 돌아보니 어느새 우리는 매주 가정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나누고, 각자의 수준에 따라 고민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날 닮았는지 조목조목 서로에 대 해 또 말씀과 세상에 대해 까탈스럽게 토론도 즐기며, 그렇게 하루, 한 주, 일 년을 세워가는 작은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일 년을 돌아보며 우리에게 선물 같은 한해를 주셨음을, 또 한 해를 세워 갈 새 힘을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된다. 


아직 우리에게 거창한 Purpose는 없다. 하지만 묵직한 Goal 정도는 있다.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30년여년 전 그때, 누군가 의 목표와 기도로 내가 그 길에 들어서게 되었고, 그 길에서 기대했던 어떤 열매는 다름 아닌 지금의 이 작은 아이들인 것 같다. 이 아이들과 우리 가족이 또 한 챕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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