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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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2-05-02 조회334회 댓글0건

[소리정음]
이중성을 깨닫게 해 준 나의 한 표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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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소리] 2022 두 번째 소리 04+05호(통권261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올해 대한민국에는 두 번의 선거가 있습니다. 

3월에는 제 20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 투표가 있었고, 6월에는 특별시 및 광역시장, 도지사 등을 선출하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습니다. 

‘선거’는 국민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으로,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릅니다. 

이 꽃을 피우기 위해 과거 어떤 노력이 있어왔고, 오늘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한 표를 행사해야 할까요? 

이번 나눔을 통해 함께 고민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다


▶ 이중성을 깨닫게 해 준 나의 한 표 _ 이상엽

▷ 이지문 중위 사건 :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의 시작 _ 윤원정 

▷ 정치 참여의 한 가지 방법, 개표사무원 _ 고효정 

▷ 정치의 시기에 언론을 섭취하는 방법 _ 강도현 

▷ 필리핀의 선거와 그리스도인 _ 길버트 테루엘 안드레스  




이중성을 깨닫게 해 준 나의 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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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엽(중앙대90)

늦장가로 얻은 7살 남자아이를 아내와 함께 50대에 키우며 힘겨워하는 월급쟁이. 

IVF 학사회장이라는 애매한 직책도 맡고 있고, 언제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노심 초사하며 살고 있다 





1992년 대선에 대해서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1992년 대선은 대한민국 제14대 대선으로 12월 18일 금요일에 실시되었다. 당시 대선에서는 3당 합당을 통한 단일화의 결과로 김 영삼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대통령 직선제로 바뀌고 나서 두 번째 선거였기 때문에 캠퍼스에서는 학교별로 총학생회가 나서서 선거 참여를 독려하던 시기였다. 학생들도 본인이 지지하는 후보 편에서 직접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내게는 대단히 생소했다.


이 글은 그때 있었던 어떤 에피소드에 관한 글이다. 당시 일을 진행하고 기획하였던 분을 찾아서 준비 과정과 결과, 평가 등을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오래전 일이어서 관련된 분들을 찾기 가 어려웠다. 나는 내 입장에서 그때의 경험을 정리해 보겠다. 따라서 이 글의 내용 대부분은 내 기억에 의존하여 재구성되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째 직선제 선거,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에 게는 첫 직선제 선거였는데, 그 선거를 앞두고 IVF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공유한다.


“간사님, 어떻게 안 될까요?” 그해 IVF 서울 지방회1) 겨울 수련회는 대통령 선거를 중간에 걸치고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겨울에 진 행하던 수련회는 3가지였다. LTC(2년차 대상), 평생동역자 수련회(3년차 대상), 그리고 겨울 수련회(1, 2년차 대상 또는 전체 대상). 보통 겨울 수련회는 대학생 방학과 동시에 바로 시작하는 일정으로 정하는 게 관례였다. 그래서 12월 중순 정도에 진행되었다. 1992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진행하는 겨울 수련회 중에, 금요일이 딱 선거일과 겹치게 되었다.2) 서울지방 대학교 대표들로 이루어진 협의체였던 ‘학협’의 임원단(회장과 부회장, 총무)은 간사님들에게 날짜 변경이 가능할지 질의, 요청하였으나, 이미 수련회 장소 등에 대한 비용이 지불된 상태에서 일정을 변경하기는 어려웠다.


“이건 아니지 않나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3)임 을 가르치는 우리가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선거에 대해서 이렇게 해버리면, 선거는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 않 을까요? 우리가 이야기하던 것과 우리의 삶이 일치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여러 번 요청하여도 돌아오는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사실 주변 환경은 학협의 의견을 들어 주기에 녹록하지 않았다. 서울지방 IVF는 바로 한 해 전 ‘6개대 사태’라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내부적으로는 전도와 제자도라는 기본에 충실하자는 분위기로 학생들을 다독이고 있었지만, 외부적으로는 보수화되었다는 지적을 받던 시기였다. 게다가 학협은 6개대 사태 때 학생 리더십을 주도하던 그룹이어서 점차 그 역할이 약해지고 있었다. 간사님들도 내·외부적으로 시선이 몰려 있는 상황에서 선거를 위해 수련회 일정을 조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면 선거 당일에 버스를 대절해서 투표할 사람들만 수련회장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것은 어떨까요?” 수련회 날짜를 변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한 누군가가 제안한 내용이었다. 일주일 수련회 중에 밖에 나갔다 온다고? 소그룹 리더가 된 이후로 이런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수련회 중에 힘들어서 집으로 가겠다는 후배들을 말린 기억은 많지만, 오히려 학생 대표들이 밖에 나가서 투표를 하고 오겠다니. 


보통 일주일간 수련회를 하게 되면, 기승전결이 명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월요일, 화요일에 탐색전이 끝나면 수요일, 목요일은 수련회의 주제와 개인의 문제들에 집중시키고, 금요일 정도에 와서는 고민한 문제들을 결단하는 클라이맥스를 지나, 저녁 소망나누기를 통한 카타르시스 방출, 토요일이 피날레. 이 정도가 일반적인 순서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요일은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볼 수 있다. 외부와 차단된 수련회장 안에서, 가장 집중해서 오롯이 본인의 문제와 공동체의 문제를 씨름하면서 하나님 안에서의 해답을 찾는 하루였다. 그런데 만약 선거를 하기 위해서 외부에 나갔다 온다면? 한껏 집중되었던 에너지는 분산되고,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는 어렵지 않을까? 수년 동안 IVF 수련회를 지내온 리더들에게는 이런 우려가 당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쉽게도 그 토의의 과정에서 어떤 공방이 오고 갔는지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누가 의견을 냈는지, 그 비용은 수련회 비용에서 충당하였는지 아니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걷어서 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엄중한 시기에, 6개대 사태가 아직 완전하게 진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 참여 문제에 관한 내용과 방식을 새롭게 고민하던 그때, 결국 학생들은 “버스를 대절해서 수련회 중간에 나갔다 온다”는 결정을 이루어냈다. 이들은 국민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수련회에 다시 돌아오는 길을 열었다.


이후 수련회 중간에 학협 임원 누군가가 광고를 했다.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수련회와 대선 날짜가 겹치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유권자의 한 표를 행사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따로 버스를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투표를 원하시는 분들은 금요일 오전 6시에 수련회장에서 나가는 차를 타면 되고, 버스는 xx지하철역으로 갈 예정입니다. 거기서 각자 투표소로 가서 투표하시고 정오까지 내린 곳으로 오세요. 거기에 다시 돌아오는 버스를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상당히 여러 번에 걸쳐서 광고한 것으로 기억한다. 


“상엽아! 너도 나갔다 올 거지?” 아마도 학협 임원 중 한 명이 나에게 물어본 것 같다. “으, 으 응….”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사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투표하러 가는 버스에 몸을 싣지 않았다. 애써 변명을 하자면 그 당시 나는 대선에 관심이 없었다. 특별히 찍고 싶은 대선 후보도 없었으며,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개인의 문제만을 파고들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물론 학협 임원들이 어렵게 준비한 과정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으로는 ‘그래도 다녀올까?’ 고민이 있었지만, 결국 아침잠의 달콤함에 넘어가고 말았다. 새벽 6시에 출발하는 차를 탈 만큼 투표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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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아들과 함께 (필자는 맨 오른쪽)

 


오후가 되어 밖에 나갔던 차가 들어오고 나서 나에게 선거하러 나갔다 오자고 권했던 친구에게 물어봤다. “어땠어? 사람들 많이 다녀왔어?” 친구는 조금 기운 없이 대답했다. “아니, 그렇게 많이 나가지 않았어. 너는 왜 안 왔어?” 나는 답을 얼버무렸다. “아…. 미안. 좀 고민할 것들이 많아서….”


여기서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나는 정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침잠이 그리워서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고, 알람에 눈은 떴지만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렵게 그 과정을 준비했던 분들에게 미안했고, 나 자신의 이중성을 발견하고 부끄러웠다. 그랬기 때문에 이 기억이 30년이 넘도록 내게 남아 있는 것 같다. 이런 결정을 내리고 실행한 것에 대해서 따로 평가회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준비했던 몇몇 사람들끼리 이야기는 있었겠지만, 저조한 참여도에 대한 실망이 주된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많은 선거가 있었다. 15대부터 시작하여 올해의 20대 대선까지, 여러 번의 대통령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했다. 세월이 흐르고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치’에 대한 관점을 형 성했다. 나 자신의 판단으로 투표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선 때면 언제나 내가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던 14대 대선이 떠올랐다. 빚진 마음 때문일까? 선거 때마다 ‘이번에는 꼭 투표해야지’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실천해왔다. 단 한 번의 에피소드는 내 안에서 대선 때마다 재생되었고, 동시에 선거권 행사를 향한 결심을 강화시켰다. 사소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 기억나지 않아도, 대선 기간이 되면 투표를 고민 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관심이 없었던 나의 이중성에 관해 반성하게 된다. 


당시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 대선 투표 버스 프로젝트.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아서 서운했을 그때의 학협 임원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여러분의 노력 덕분에, 저는 평생 투표를 놓치지 않고 참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                                       



1) 서울 지방회는 1990년에는 분리 운영을 준비하였고, 1991년부터 서서울과 남서울, 동·북서울(이후에 다시 동서울, 북서울로 나뉨)의 3개 지방회로 분리되었다. 1992년에는 완전 분리되었지만 여전히 수련회는 함께 모여서 진행했다.

2) 지금은 차기 대선일도 미리 알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대선이 언제 있는지 기억하기는 쉽지 않았다. PC통신은 있었으나 인터넷 보급 전이고 두 번째 직접 선거라 관련 법령에 대해서도 일반인이 숙지하고 있지 못했다. 

3)  IVF의 비전은 시대별로 변해왔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비전은 92년도 전후에 사용된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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