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정음]
서울 촌놈의 회고록 [서울 중심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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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2 세 번째 소리 08+09호(통권263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서울 중심 대한민국
최근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경기도에 살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등장인물들의 고충에, 많은 경기도 주민들이 공감을 표하며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입니다.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서울의 인구밀도는 1㎢당 15,839명으로, 2순위인 부산(1㎢당 4,248명)의 약 4배에 이릅니다.
서울에 많은 인프라와 일자리, 문화, 교육 면에서의 혜택이 집중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서울민국’은 지방과의 격차를 더욱 벌리며 불평등한 상황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실제 어떤 불평등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서울 중심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 서울 촌놈의 회고록 _ 전전
서울 촌놈의 회고록
pixabay.com
◆ 전전(고려대98)
1979년 서울 도봉구 수유동에서 태어나,
수련회 빼고는 일주일 이상 서울을 떠나본 적 없는 서울 토박이.
“당연하죠. 좋은 일자리는 다 서울에 있으니까요.”
왜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진부한 사실인데도, 어느 날 갑자기 깊은 인상으로 남아 두고두고 삶의 시선을 바꾸기도 하는 순간. 이 경험이 바로, 살면서 내가 얼마나 서울 중심의 사고에 갇혀 있었는지 번쩍 깨닫게 해 준 우연한 순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의 어느 날이다.
어쩌다가 페이스북에서 인연을 맺은 친구가 서울에 볼일이 있어 대전에서 올라왔다(고 쓰고 한참을 생각한다). 나는 오프라인으로 한 번 이상 만나보거나 이미 잘 알고 있는 지인만 페친을 맺는데, 이 사람은 순전히 온라인으로만 이어진 벗이다. 본인도 특별히 나를 만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온 김에 같이 밥이라도 먹을 사람 찾다가 내가 반응한 게다.
나는 맛집을 잘 찾아다니는 실력도 없거니와 다른 지방 사람들처럼 자신 있게 ‘서울의 맛’이라고 할 건 또 뭐가 있지 싶어서 그냥 그가 돌아갈 기차 시간에 맞추어 서울역 근처에서 식사하고 차를 마셨다. 그러고 보니 그가 ‘볼 일’이라고 했던 것도 어느 강연을 듣고자 함이었다. 대전에서 일부러 서울까지 찾아온 그 열정을 칭찬하자, 그는 오히려 좋은 강연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서울을 부러워했다. 이제 내가 부러워해 주어야 할 차례. 예전 직장에서 출장을 가기 위해 대전에 고작 몇 번 방문했던 경험이 전부지만 해 봐야지. 우리나라 교통의 중심지라 불릴 만큼 좋잖아요. 가보니까 도로도 넓고 동네가 탁 트여서 전망이 좋더라구요…. 블라블라. 고백하건대 내가 업무로 찾았던 지역은 둔산동이라 그때만 해도 대전에서 신시가지였다. 상대방을 더 띄워주고 싶었지만 별다른 소스가 없어서 이제는 나를 낮추는 방법을 찾았다. 서울 불평하기. 나는 변두리 사는데 교통 체증은 말도 못 하고, 오히려 경기도는 심야버스도 있고 거기서는 나보다 강남까지 출퇴근 시간이 더 짧다는 둥, 사람은 바글바글하고 공기도 나쁘고 수많은 건물 실외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더위, 높은 집값은 말도 못 하지…. 어쩌구저쩌구.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는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애향심’이란 게 서울 사람들에겐 없는데, 그러면서 서울을 잘 떠나지도 않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더. 왜들 그렇게 서울로 몰려오는지 모르겠어요.
“당연하죠. 좋은 일자리는 다 서울에 있으니까요.” 그는 이어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진로 문제를 고민하는 20대 후반의 그가 일부러 강연을 들으러 서울에 올라와야 하는 이유와 그렇게 시간을 낼 수 있는 이유. 서울로 진학해서 괜찮은 직장에 들어간 친구들과 여전히 대전에 살고 있는 친구들의 일반적인 급여 수준을 언급했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본인보다 10살이나 많은 어느 서울 사람의 겸손한 척하는 엄살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금방 깨달았다. 그 자리 덕분에 내가 서울 중심의 사고에 단단히 갇혀 있었단 걸 새삼 반성했고 가르쳐 주어 고맙기까지 했다. 그 뒤로 다시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가 각자의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으며 아직 얼굴을 다시 맞댄 적은 없지만, 대전에 올 때 연락하라는 안부인사를 하는 걸 보면 그때 나의 무지에 대한 실망이 관계를 끊게할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혹시 그마저도 너무 익숙해서였던 탓은 아닐지 모르겠다.
무지하고 무심할 수 있는 특권
그날 이후, 그러니까 서른 중반이 넘어서야 깨어진 껍질은 일단 이전의 삶부터 돌아보게 했다. 여름방학 때 잠시 다녀온 농활. 일하다 쉬는 시간에 길가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조용하고 한가로운 밭두렁을 보면서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라는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옆에서 선배는 ‘어쩌다가 한번 방문하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평생 여기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 자신 있느냐’고 쏘아붙였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마침 그날 저녁 현지 농민 한 분이 서울 사람들이 쉽게 ‘다 때려치우고 농사나 지으러 내려가야겠다’라고 하는데 그게 얼마나 불쾌한 말인지 한참 이야기해주셨더랬다.
지방 사람들이 언급하는 불편 중에 문화시설과 병원을 꼽는데,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차피 평생 종합병원 응급실을 몇 번이나 가며, 서울 사람이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몇 번이나 보겠느냐고 대꾸하곤 했다. 모르는 소리.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데 이용하지 않는 것과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은 천지 차이란 걸 그땐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는 지방에서 서울로 진학한 친구들을 대하는 무례한 서울 친구들이 코믹하게 잘 묘사된 장면이 있다. 생각해보니 나도 20대 때 친구들에게 그랬던 것 같다. 단순히 경험이 많지 않아서 생기는 해프닝이라기엔 매우 일방적이고 서울 중심적인 사고들의 향연이었다. 그렇지, 몰라서 그랬지. 하지만 몰라도 되는 것, 그래서 더 무심하게 내뱉을 수 있던 건 일종의 특권이던 게다.
예전에 백화점 본사 식품 MD로 일한 적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공품 부문에서 과자, 음료, 면류 등을 담당했다. 통칭 바이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우리 백화점에서 판매할 상품을 선정하고 판매할 수 있도록 등록하는 것이 가장 잦은 업무다. 취급하는 상품의 특성상 산지를 돌아다니거나 도매유통사를 찾아갈 일은 별로 없고, 주로 각 가공식품회사 영업담당자들이 찾아와 내미는 상품과 기획안을 보고 업무를 진행한다. 가끔 방문하는 지방 점포의 식품관 담당자를 만날 때마다 불만의 목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본사가 지방 영업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지방 점포에서는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 1+1이나 묶음 상품 과자 등을 진열하고 판매하고 싶은데, 본사에서 상품코드를 등록해 주지 않으니 도통 팔 수 있는 상품이 없다는 얘기이다. 맞는 말이다. 상품코드 하나 더 등록하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랬다. 본사 MD 입장에서의 변명은 그런 묶음 상품이 백화점이란 위상에 어울리지 않아서다. 애초에 상품의 질이 다른 것도 아닌 가공식품은 대형할인점에 비해 가격경쟁력도 없는데, 작은 점포 안에 묶음 상품만 잔뜩 가져다 놓아도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답을 한다. 내 생각이 아니라 상사의 대답(對答)을 대(代)답한 것 밖에 안 된다. 사실 지방 점포 담당자가 지적한 대로 우리 머릿속에는 서울에 있는 명품관만 들어있었다는 게 더 솔직했으리라.
그런 사례는 많다. 본사교육, 본사회의, 컨퍼런스, 이런 건 늘 서울이다. “왜?”라는 질문을 한다면 본사가 서울이니까, 참석자 중 서울에 사는 사람이 가장 많으니까 등등 그때마다 이유를 댈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그냥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 정말로 시간과 비용을 꼼꼼히 따져보면서 가장 좋은 안을 내어놓았다고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무심해도 늘 그래왔으니까, 그리고 난 서울 사람이라 고민할 수고를 덜었던 것이고.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은데
그동안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특권의식으로 부지불식간에 내뱉은 수많은 말들이 얼마나 상대방을 불쾌하게 했을지 몰라 부끄럽다. 한편으론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많은 사례들이 궁금하다. 그런 인생 공부를 또 해 볼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스무 살에 서울에 있는 학교로 진학해서 마흔이 넘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그러니까 이제는 서울과 수도권에서의 삶이 더 오래인 선배나 후배들을 여전히 고향 출신으로 바라보는 것은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들은 또 스스로 어떻게 여기는지도 궁금하다. 가끔 지방으로 근무지를 이동한 친구가 서울과는 사뭇 다른 그곳의 이야기를 해 주면 더 귀 기울이곤 한다. 늦었지만 이것도 다 공부이리라.
언젠가 유력 대통령 후보가 지하철 승차권을 구입하는 걸 잘 못 해서 두고두고 회자된 적이 있다. 억지 ‘서민코스프레’ 아니냐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사람들의 비판과 비웃음 속에서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서민이라는 발상 말이다. 진짜 그 장면이 선거 운동하는 이들의 기획이었다면, 그것을 기획한 사람도 그리고 ‘지하철을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른다’라는 사실 하나로 간단히 서민과는 거리가 먼 후보감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모두 예전의 나처럼 서울사람 사고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언뜻 떠올려 봐도 지하철이 있는 도시가 전국에 몇 안 될 뿐더러 서울처럼 노선이 촘촘히 형성되지 않았으니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서민의 발’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요즘 자주 접하는 유투브 컨텐츠에서도 그렇다. 종종 해외에서 방문하거나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한국의 좋은 점을 말하는 영상을 접한다. 한껏 칭찬을 듣다가 보면 뭐 이게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인가 싶다가도 괜히 기분이 좋고 자랑스럽다. 대부분 빠르고 편리하며 안전한 대한민국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잠자코 듣다가 보니 영상 속의 외국인들은 주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거나 서울에서 직업을 가지고 활동하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같은 서울이라도 당장 우리 동네에 사는 외국인들이 들으면 동의할 수 있을까 싶은 이야기를 발견하니,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사는 이민자들은 이런 영상에서 쉴 새 없이 쏟아내는 ‘한국’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 동네엔 역사가 오랜 초등학교가 있다. 지금은 한 학년에 한두 반이다. 처음엔 서울 하늘 아래 이런 학교가 있는가 싶어 놀랐다가, 자연스럽게 저출산 사회를 체감한다. 그런데 이것도 이미 오래전부터 겪고 있던 지방에서는 뒤늦은 호들갑인 것처럼 냉소할지도 모르겠다. 이 와중에 서울 외곽의 신도시에는 우리 어릴 때 아파트촌 학교처럼 학생 수가 많다고 하니 이건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연한 기회로 늦게나마 서울 촌놈임을 실감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늘 더 조심하고 노력해 보지만, 생각보다 그때만큼 좋은 인생 선생을 주변에서 만나기 어렵다. 다들 서울사람이거나 서울 사람이어야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태어나 자란 동네가 서울이라는 이유로 모른 채 무심하게 살아도 되는 서울 사람. 원자력발전이니 신재생 에너지니 한참 논쟁에 참여해도 그런 시설들이 내 집 가까이에 지어질 상상은 안 해 봐도 되는 그런 서울 사람. 이 글을 마무리 지을 즈음 나는 스스로 서울 촌놈이라고 불렀지만, 어느 누가 서울 촌놈이라고 불러도 전혀 타격 없는 이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본다. ‘서울’ 촌놈이니까 가능하다는 걸 새삼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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