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정음]
신참 교사와 사랑으로 자라가는 교실 [누구나 새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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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2 세 번째 소리 06+07호(통권262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누구나 새내기였다
▶ 신참 교사와 사랑으로 자라가는 교실 _ 김시원
▷ 신입사원 생존기
신참 교사와 사랑으로 자라가는 교실
3학년 7반 아이들과 함께 작업한 '사랑의 가치'
◆ 김시원(춘천교대15)
아이들로부터 배우고, 함께 자라가는 신규 교사입니다.
* 본 글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서로가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참이며 배움이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을 꿈꾸었지만, 막상 교대에 입학하자 환상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요즘 찾기 힘든 평생직장을 갖게 되었다는 안정감은 때로 독이 되어, 나로 하여금 타성에 젖게 만들고 더 이상의 모험은 없다는 권태에 빠지게 할 것 같았다. 꿈을 이루었지만 오히려 공허감에 빠져있던 교대 1학년 시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이유를 찾고자 나는 휴학을 하고 비행기 표를 끊었다.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이 정말 있다면, 그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교회 공동체에 속하긴 했어도 정처 없이 방황만 하던 내가 신앙의 첫 발을 떼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하와이에서 주님을 알게 되고, 자연스레 성경에 호기심이 생겨 공부하러 다시 해외에 나갔다. 국내외를 오가며 신앙 안에서 나를 발견해나가자 교직과의 연결고리는 차츰 옅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신학을 하는 것이 내게 더 어울리는 선택으로 보였다.
그러나 임용고시를 선택하고 교실에 돌아온 것은, 아무리 아름다운 언어로 신앙을 서술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사랑으로 꽃피지 않으면 무가치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사는 아이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며 살아갈 수 있는 축복받은 자리였다. 인격이 형성되고 가치관이 빚어지는 결정적인 시기, 이 시기의 아이는 자기가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대로 자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친구들이 보는 방식대로 자신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자아를 빚어가는 일, 우리 사이에 거하는 사랑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이와 나, 그리고 학급 안에 새겨져 일하기 시작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책임이 크고 조심스럽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자리. 언제고 뒤돌아보더라도 따스한 뿌듯함에 배시시 미소가 번질 수 있는 자리. 나는 그런 자리에서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졸업 후 1년간의 고민 끝에 교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멋들어진 말 뒤엔 교육 현장의 현실이 있었고, 그곳에 미숙한 내가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막상 부딪히는 현실은 매번 생경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내가 처음으로 맡게 된 반은 통합학급이었다. 통합학급이란 지원반에서 특수교사의 지도를 받는 아이가 교실에서도 함께 수업을 들으며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함께하는 반이다. 교사로서 마음 한 편의 부담을 떨치기 어려웠다. 게다가 더 알아보니 다문화 가정, ADHD 기질을 가진 아이들도 우리 반에 있어 초임교사인 내게 쉽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또 연단이 시작된 것일까…. 나는 어깨를 피려 애쓰면서도, 스스로가 준비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에 염려를 떨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뭐 어쩌겠나. 뭔가 단단히 배울 것이 있나보다 생각할 수밖에.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그중 어떤 하루를 소개한다.
“선생님, 빨리 와보세요!!” 교실 컴퓨터가 고장나 연구실에서 학습지를 챙겨온 나는 교실 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다들 당황한 기색이었다. “무슨 일인데?? 아니, 무슨 일이니??” 고개를 돌려 보니 여자아이 몇 명이 영은이를 둘러싸서 토닥이는 듯했다. 아찔한 느낌이 이런 걸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우에엥…! 선생님 준아가…. 훌쩍….” 아이는 많이 울어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준아가 무릎으로 쳤어요. 너무 아파…. 우에엥”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애가 여자애를, 그것도 손이 아니라 무릎으로? 우선 어디를 맞았는지 알아야 한다. 잘못하면 큰 사고일 수 있다. ‘하아, 준아는 지적장애가 있어 좀더 세심하게 봤어야 하는데….’ 교실을 비운 것에 후회가 밀려왔다. “준아가 어디 때렸어?” “허벅지요. 멍든 것 같아요. 훌쩍” 다행히 복부는 아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들어보니 준아가 쉬는 시간에 칠판에 낙서를 했는데, 분필 낙서는 금지되어 있어서 영은이가 낙서를 지웠다. 그러자 준아가 화가 나 영은이를 무릎으로 쳤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는 준아에게 너무 화가 났다. 영은이는 준아 공부를 도와주던 친구인데…. 하지만 마냥 화를 낼 수는 없다. 준아도 우리 반 아이니까. ‘하, 내가 왜 자리를 비웠을까!’ 분노는 곧장 나 자신에게로 향하고 곧이어 주님께도 하소연을 했다. ‘주님, 저 신규에요. 그런데 통합반이라니요!’ 상황이 상황인 만큼, 급식을 먹으며 영은이 어머니께 황급히 사건을 알렸다. 안타까운 마음은 계속 가슴을 눌러 다음 날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도 자책하는 기도만 나왔다. ‘주님, 그 어머니께서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딸이 맞았다는데…. 제가 미숙해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주님?’
‘공동체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급진적인 방법이다’라는 생각에 결국 교실로 돌아온 나였다. 그런데 가장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기도하는데 주님이 ‘너도 나의 귀한 딸이다. 나는 네 마음도 상하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염려를 가라앉히고 주님께 지혜를 구했다. 그리고 지원반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 함께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내친김에 준아의 아버지도 학교에서 뵙기로 해서 3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준아가 자폐 스펙트럼에 있지만, 요즘 장난이 늘어난 것 같아요. 혼자 놀던 습관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달까.” 내가 말했다. 그러자 지원반 선생님이 제안하셨다. “선생님, 그럼 쉬는 시간마다 7반 아이들을 4명 정도씩 내려 보내서 준아랑 놀게 할까요?” 처음 생각했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지도법이었다. 혼자 놀기를 좋아하던 준아가 요즘 친구들을 툭툭 치는 것은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자폐 스펙트럼에 있으면 관계성이 약할 수 있는데, 이 아이는 그래도 친구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 손에서 크며 줄곧 혼자 지내왔기에 사회적 기술이 약하고, 어울리고픈 마음은 폭력적인 말과 행동으로 와전되곤 했다. 그러니 반 아이들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께 들어보니, 밖에서 아이들이 준아를 만나면 바보라도 놀리기도 했단다. 준아의 상처받은 마음이 느껴졌다. 되돌아보니, 준아가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해온 스트레스가 이 사건을 터지게 한 원인 같았다. 그래서 다같이 논의한 결과, 친구를 때린 준아에게 친구와 노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쉬는 시간 한 타임을 20분으로 늘려 지원반에 아이들을 4명씩 보냈고, 지원반에서 준아와 자유롭게 보드게임을 하도록 했다. 그렇게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허락하자 교실에는 조금씩 새로운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준아가 스트레스 받을 때 손을 긁는 습관이 사라졌다. 그간 준아의 말과 행동에 당황하여 굳어졌던 반 아이들의 마음도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친구들이 준아와 어울리기 시작하자 영은이의 놀란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이때다 싶어 지원반에서 국어와 수학을 듣던 준아를 국어 시간에만 교실로 올려 보내달라고 부탁드렸다. 마침 국어 단원이 ‘내 마음을 전해요’라서, 준아에게 사회적 기술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단원에서 아이들은 편지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고 그것이 관계에 윤활유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단원이라, 준아에게 꼭 필요한 수업 같았다.이 경험을 아이들이 교실에서 충분히 얻어가게 하고 싶어 모둠별로 앉히고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우리 반에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친구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은지.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내용을 적어 나눠보라고 했다.
그런데 교실 한쪽에서 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목소리에 깜짝 놀라 아이들의 눈길이 준아에게 쏠렸다. 나는 준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준아야, 그 말을 누구에게 하고 싶었어?” “장영은이요,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준아의 사과에 교실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아이들은 준아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그것을 사과할 수 있는 친구인지 몰랐다. 그래서 준아 곁에 가기를 피하고, 친구들 안으로 초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과를 듣자 준아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가슴 깊이 미안해하는 준아의 모습에 진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준아야, 마음은 그렇게 전하는 거야. 준아를 보니까 보민이 마음은 어때?” “음…. 뭔가 기특해요.” 준아 짝꿍인 보민이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준아가 반 아이들로부터 용서를 받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쉬는 시간, 영은이가 준아에게 다시 공부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목울대가 뻐근해졌다.
교직에 마음을 붙이기로 한 것은 ‘사랑이 할 일을 나도 하겠다’라는 당찬 포부였지만, 현장에서 나는 하루하루가 새로운 신참 교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일을 감사히 여기는 까닭은 3학년 7반 아이들이 나름의 연약 속에서 깨어짐을 통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만약 준아가 없었다면, 준아와 영은이 사이에 깨어짐이 없었다면, 우리 반은 나와 다른 타인에게 놀라기만 하고 어쩔 줄 모르던 기존의 패턴을 고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가 있기에 배움이 시작되었다. ‘너’를 알아가려 하는 ‘나’의 사랑 속에서 아이들은 그들이 속한 학급 공동체를 빚어가고, 함께 뿜어내는 따스한 수용 속에서 서로를 성장시켜간다. 다투고, 용서하고, 다시 어울리며, 자기의 실패와 타인의 연약함을 품을 마음 그릇을 넓혀가는 것이다. 이렇듯 서로를 향한 사랑은 마침내 아이 각자의 정서적 지지 기반이 되어, 훗날 삶에서 마주할 다양한 어려움을 극복할 자원이 될 것이다.
교실은 나도 가르친다. 곁에 있는 아이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내 인생에 이야기를 부여하고, 이 책임이 삶의 이유를 더해준다는 것. 평생직장이란 안정감이 권태로 변질되고 타성에 젖어 살아갈 것이 두려워 교직을 택하기 머뭇거렸으나, 목적의식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주변에서 내가 맺어가는 관계들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해간다. 그렇다. 진정한 배움은 매일 교실에서 시작된다. 사랑으로 인해, 사랑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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