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정음]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통과 의례 [송구영신(送舊迎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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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2 첫 번째 소리 02+03호(통권260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
▶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통과 의례 _ 전소라
▷ 내가 주님과, 주님이 나와 함께하는 시간 _ 김현숙
▷ 코로나 시대 간사의 삶, 다시 돌아온 한 해 _ 김주완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통과 의례
◆ 전소라(중앙대08)
나의 일을 내 손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프리랜서.
생각도, 감정도, 집도 정리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정리 덕후.
일상 속 깨알 같은 순간을 포착하며 가꾸기를 즐기는 사람.
D-30, 새해를 준비하는 나만의 루틴
한 해의 끝이 다가온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11월 말에서 12월 초. 나의 손과 눈은 그 어떤 때보다 분주해진다. 새해에 1년 동안 쓸 소중한 다이어리와 달력을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다이어리를 처음 쓰기 시작한 때는 10대 초반인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였다. 각종 스터디 플래너와 함께 다이어리 꾸미기를 즐기던 10대의 나는 30대가 되었지만 여전하다. 1월부터 12월까지 빼곡하게 적지 못할 때도 많았고, 해마다 쓰는 다이어리 종류도 제각각이라 쓰다 안 쓰다 하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매년 다이어리를 주문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으라던 말씀처럼, 나는 ‘새해’라는 포도주를 ‘새 다이어리’라는 부대에 담아야 한다. 가급적 자원 낭비를 막기 위해 내가 정말 필요한 내용만 있는 다이어리를 찾아 빼곡하게 쓴 지도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특히 학부 리더를 하던 시절에 내 다이어리는 지극히 공적인 용도로 많이 쓰였다. 그럼에도 그때 나 지금이나 다이어리는 늘 나에겐 없어선 안 될 존재다. 이쯤 되면 내 다이어리 사랑(?)에 대한 이유를 밝혀야만 할 것 같다. 안 그러면 그냥 다이어리 집착증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뭐든 끄적이고 기록하는 걸 좋아하는 성향도 있었지만, 자기소개 글에서 밝혔듯이 나는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를 못 견디는 사람이다. 이건 단순히 집 정리나 물건 정리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나의 감정과 생각에도 해당한다. 감정과 생각이 뒤엉킨 채 무언가 잘 잡히지 않은 상태로 며칠을 보내면 나는 점점 시들해진다. 떠다니는 감정과 생각에 계속 매인 채로 있다 보면 집중도 잘되지 않고 굉장히 찝찝한 상태로 한껏 예민해 진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나는 다이어리에 지금 드는 생각부터 온갖 감정을 쭉 써 내려 가곤 한다. 그러고 나면 마침내 내가 진정 원하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지금 나의 상태가 어떤지를 발견 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몇 번씩 하면서부터는 당연한 나의 루틴이 되었다. 뭔가 답답하다, 생각이 복잡하고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싶을 때면 시간을 내서 혼자 다이어리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내 안에 부유하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하나씩 적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도 마음도 개운하게 맑아진다. 마치 목욕탕에서 묵은 때를 벗기고 온탕에서 시원하게 지지다가 나온 느낌이랄까. 내 뇌와 마음을 깨끗하게 빨아 뽀송뽀송하게 말린 것 같이 시원하다. 적게는 한 달에 한 번, 많게는 한 주에 한 번 이상 이런 시간을 갖는다. 따라서 이걸 기록하고 담아낼 다이어리는 내게 한 해를 시작하는 필수품이다.
나름대로 다이어리를 고르는 기준도 가지고 있다. 첫째, 월 기록이 맨 앞에 한꺼번에 들어 있을 것. 1월부터 12월까지 12장의 월별 캘린더 페이지가 제일 앞에 있어야 한다. 중간중간 들어가 있으면 찾아서 쓰기가 아주 번거롭다. 둘째, 월별 페이지 이후 들어가는 주간 기록 페이지는 굳이 많지 않아도 된다. 나는 월별 기록을 남기고 기억하고 싶을 때 메모지를 사용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래서 월 페이지 이후에 주간 페이지는 아예 없는 다이어리를 찾는 편이다. 셋째, 어쩌면 가장 중요한 기준. 1년 동안 곁에 두고 쓰는 만큼 디자인이 깔끔하면서도 오래 보아도 좋을 만해야 한다.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이지만, 그냥 내 마음에 들면 된다는 말이다. 거기에 다이어리 커버가 좀 튼튼하거나 잘 상하지 않는 재질이면 더 좋고, 가격대도 1~2만 원 이내면 최고!
이렇게 나의 체크 리스트를 통과하는 다이어리를 찾고 나면, 다음에는 달력을 고른다. 달력은 거실에 둘 탁상용 달력 하나와 서재의 모니터 앞에 두고 쓸 작은 달력이면 된다. 이때 달력은 1년 내내 봐도 안 질릴 만큼 무조건 귀여워야 한다. 이렇게 달력과 다이어리를 선별하고, 12월 중순이 지나기 전에 주문해둔다.
D-14, 올해 사진을 돌아보며 회고하기
12월이 한 해를 돌아볼 기회들이 많은 시기인 만큼, 나 역시 올 한해가 어땠는지 더 적극적으로 돌아보기 시작한다. 기억은 늘 한정되어 있고, 떠올리던 기억들만 떠올리기 쉽기에, 핸드폰에 저장한 올해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훑어보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떠올려본다.
나는 사진으로 일상을 기록하는 걸 좋아하기에, 내 사진첩은 연말이 되면 3~4천 장에 달한다. 12월 사진첩에는 중간중간 클라우드로 옮기며 정리 하고 남은 사진들만 있다. 그 사진들을 1월부터 살피다 보면,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즐거웠던 순간, 만났던 사람, 했던 일, 읽었던 책 등, 일상 속 다양한 행복의 순간들을 마주한다.
‘그땐 그랬지’, ‘와, 이런 일도 있었지’, ‘어? 나 여기도 갔었네’ 같은, 잊었던 기억을 다시금 생생하게 느낀다. 그러면서 내가 보내온 순간들을 차곡 차곡 마음에 담는다. 그러고 나면 힘들고 아프고 어려웠던 감정들보다 감사한 순간, 행복했던 순간들이 더 마음에 남는다. 올해도 참 감사하고 행복했구나. 사진 속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따라 미소 짓는 시간을 보낸다.
D-7, 이전 다이어리를 떠나보내고, 새 다이어리를 맞이할 준비하기
이제 정말 연말 카운트다운을 시작할 시기다. 이번 해의 남은 날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시점이 되면, 다이어리를 정리하며 마무리할 시간을 갖는다. 앞서 사진으로 생생히 얻어낸 감각들을 다시금 언어로 풀어내는 시간이다. 다이어리에 적어둔 기록들을 읽으면, 올해 1년이 나에게 어떤 한 해였는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 시간이 내게 남겨준 의미도 하나둘 언어로 쌓인다. 이제, 그 언어들을 모아 한 해를 돌아보는 글을 새 다이어리에 쓴다.
이 내용을 다음 해 다이어리 맨 첫 장에 써두는 이유가 있다. 새해가 뚝 떨어진 새로운 시간이 아니라 이전 시간으로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간 임을 스스로에게 말해주기 위해서다. 나의 올해는 이런 시간으로 흘러왔고, 내년을 바라보면서 이런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자연스레 남길 수 있다. 이렇게 한 해를 떠나보낸 소회는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고, 해를 보낼 때마다 나의 삶이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게 하는 지표가 된다.
D-1, 새 달력을 집안 곳곳에 놓아두기
진정한 송구영신의 시간. 한 해 내내 거실 식탁 한 쪽을 차지했던 달력과 책상 모니터 앞에 두었던 달력을 새것으로 바꾼다. 이제 정말 다시 새해를 카운트할 시간이다. 올 한해 고마웠던 사람들, 어 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사람들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건넬 인사를 준비한다. 얼굴을 볼 수 없는 요즘이라 더더욱, 잊기 쉬운 인연들에 대해 올해도 수고했다고, 함께 2021년을 살아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넬 채비를 한다. 무엇보다 지난 1년도 수고 많았다고 나 자신에게 인사를 건넨다. 정말 수고했다, 올해도!
D+1, 새로운 목표와 계획으로 다이어리 시작하기
새로운 한 해가 되면 작년을 돌아보며 정리한 새 해에 대한 소망을 이어받아,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을 적는다. 어떤 한 해가 되길 바라는지 구상만 하던 내용을 이제는 손끝을 통해 다이어리에 옮기는 것이다. 학부 때부터 POGS 짜던 버릇(?)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구체적인 계획을 짜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정말 내가 이룰 수 있는 수준인지를 심사숙고한다. 내 에너지와 성향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목표를 짜는 바람에 실패감을 느끼는 건 그리 달갑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룰 수 있는 소소한 성취부터 도전해볼 만한 것까지 적절히 섞어서 계획한다. 무리해서라도 꼭 도전하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그것을 이루는데 에너지를 집중하기 위해 다른 목표들은 기준을 낮추어 잡기 도 한다.
나다운 삶을 만들어가는 한 해가 되길 바라는 마 음으로 목표들을 계획하다보면, 부담감보다는 잘 해보고 싶은 마음, ‘으쌰으쌰’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 이 밑그림을 토대로 한 해를 상상하면, 새롭게 그려질 삶에 관한 소망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2022년도 잘해봐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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