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정음]
길고 긴 출근길에서 얻은 유익 [길거리의 일상, 나의 출퇴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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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1 두 번째 소리 04+05호(통권255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길거리의 일상, 나의 출퇴근길]
▶ 길고 긴 출근길에서 얻은 유익_조찬일
길고 긴 출근길에서 얻은 유익
◆ 조찬일(UNIST09)
마음속에 지닌 말씀(딤후2:15)과는 달리 부끄러울 것 많은 무익한 종이나,
부르신 곳에서 매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교육 콘텐츠 스타트업의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으며,
SNS에서는 ‘감성캥거루’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화성에서 강남까지 왕복 3시간. 그마저도 비가 오거나 막히면 4시간도 더 걸리는 출퇴근길. 믿음으로 살아 내리라 다짐했건만, 본격적으로 업무를 하기도 전에 피곤을 깔고 들어가는 이 여정의 시작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왜 변함이 없는 것 일까요?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었던 버스를 오르며 오늘도 어김없이 인사를 드립니다. 무수히 많은 승객 중 한 명일뿐이기에 기사님께는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제 인사가 그분의 하루를 바꾸길 바라며, 그리고 제가 특별한 승객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인사를 드립니다.
매일 같은 시각에 타는 버스에 오르면, 어제와 엇비슷한 구성원이 보입니다. 열에 여덟은 어제 앉았던 그 자리를 저마다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따금씩 다른 경우가 있는데, 어제와 다른 점을 찾는 것도 소소한 재미입니다. 마치 ‘다른 그림 찾기’처럼요. 나와 같은 사람들. 의도치 않은 동행이지만 그렇게 하루의 짧고도 긴 여정을 함께 합니다.
그 시간에 버스를 타고 가면 줄곧 버스 오른쪽에서 햇빛이 비치기 때문에 버스 왼편의 앞쪽 좌석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버스 출발지와 멀지 않은 곳에 살기 때문에 무조건 앉아서 갈 수 있다는 점은 다행입니다. 그러나 회사가 종점에 있어서 편도로만 1시간 반~2시간이 소요된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출퇴근 시간에는 참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인스타그램을 켭니다. 그리고 주말 동안 다듬어 놓았던 시를 올립니다. 집 밖을 나오며 마신 상쾌한 공기, 정류장 가는 길에 종이꽃처럼 하늘 거리는 이팝나무, 매번 새롭지만 변함없이 아름다운 하늘과 구름, 퇴근하며 보던 불빛들, 정류장에서 끄적이던 여러 단상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경이로움과 이런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느끼게 하심에 대한 감사함을 마음에 담다 보면 하나님이 영감을 주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던 그때의 기쁨을 살짝 맛볼 수 있는데, 제게는 시를 짓는 순간이 딱 그렇습니다.
이팝
사랑하는 이팝
한웅큼 불어온 봄결에
아마도 설레었는지
흔들리어 떨어진 너의 마음들이
너와 내가 함께 한 시간을 따라
서성이던 새들의 발자국으로 남았지
아름다운 이 밤
소복히 쌓인 잠결에
몽롱히 보이는 가로등 불빛으로 한껏 물들어 너와의 짭쪼름한 감정들이
슈레드 치즈처럼 추억 위로 깔려있어
어릴 적 어른들이 “너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라고 놀리면 동공이 흔들리다가도, 부모님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아, 나 부모님 아들 맞구나~’하던 때가 있었어요. 시를 짓다 보면, 하나님이 “역시 내 아들이야~”라며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합니다.
사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시를 올리고 나면 병든 닭처럼 졸기 바빴습니다. 특히 이사를 하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집도 더 멀어졌고, 시간 예측이 비교적 편한 지하철 대신 버스로 통근하게 되면서 출근시간이 앞당겨졌거든요. 운행 중의 흔들림이 심하다 보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체력 소모가 심하고 자도 자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센 회의감이 저를 사로잡았어요. ‘나 왜 이렇게 됐지? 학사가 되어도 학생 때와 같이 뜨겁게 세상 속 하나님 운동을 하며 살리라 다짐했던 나는 어디 갔지?’ 사실 이건 어느 학사님이나 동일하게 겪는 고민일 것 같아요. 그러나 문제를 인지했을 뿐, 그에 대한 해결책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오랜 기간을 대형교회의 반복되는 프로그램에 익숙해지고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명목 하에 소모되기를 반복하다가, 제 영혼을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예배의 회복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 감사한 인연으로 교회에서 사역자로 만났던 목사님과 개척을 하게 되었어요. 교회 이름이 무려 ‘공학교회’랍니다. 이름이 좀 웃기죠? 교회 이름을 얘기하면 “무슨 교회 이름이 그러냐”라고 다들 의아해해요. 이 이름은 ‘비울 공, 배울 학’, 나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을 배운다는 의미에서 ‘비움, 배움, 나눔’을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랍니다. 목사님은 항상 “기본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씀을 하시는데요. 그렇게 작년 중반부터 함께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후로는 시를 올리고 나면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 기도를 한 뒤 성경 앱을 켭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성경을 일독한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예전엔 무슨 짓을 해도 레위기에서 막히던 말씀이 술술 읽히고 재미있기 시작했습니다. 화성 시내와 수원 시내를 다 돌고 나면 고속도로에 접어드는데, 그 전까지 열심히 읽으면 하루에 8~12장은 읽을 수 있더라고요. 그렇게 매일 말씀을 가까이 하다 보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지하는 것도, 하나님의 의중을 여쭙는 것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덤으로 새해가 되기 전에 성경 일독도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성령의 이끄심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리타분하게만 생각하던 말씀읽기가 재미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제 영혼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거든요. 그렇게 깨달았습니다. ‘꼭 이전과 같은 뜨거움을 회복할 필요는 없구나. 그저 지금 내 상황에 맞게 잔잔함 속에 하나님을 묵상하고 친밀감을 회복해가면 되는구나’라는 것을요.
고속도로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말씀 읽기를 멈추고 눈을 붙입니다. 말씀에 대한 묵상을 하기도 하고, 회사에 도착해서 해야 할 업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자란 수면을 보충하기도 해요.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던 업무상의 문제도, 이 시간에 주신 아이디어로 해결될 때가 많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효과적인 해결책이 떠오르거나 정공법으로 부딪힐 용기를 얻는 식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위로를 받고, ‘오늘도 하나님이 하신다!’라는 확신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통해 성령 안에서 내 삶의 모든 순간들이 승리를 향해 달려간다는 그 확신은 여전히 부족하고 넘어질지라도 덜 넘어지고 더 쉽게 일어나게 합니다. 사실 이렇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기 때문에 고속도로에서의 풍경은 본 적이 없습니다. 재택이 풀리면 고속도로에서의 풍경도 눈과 마음에 담아봐야겠어요. 하나님이 새로운 것을 말씀해주실지도 모르잖아요?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본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아름다운 테피스트리 같다고 하시더군요. 슬프게도 인간은 그 뒷면만 볼 수 있다고요. 지저분한 실밥과 우중충한 색깔만을요. 우린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어요. 반대편에서 테피스트리를 제대로 볼 수 없으니까요.” 언젠가 이 땅에서의 생을 다한다면 하나님 곁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온전히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금보다 희망차게 살아갈 동력이 되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리면 진정한 하루가 시작됩니다. 말씀으로 무장도 했겠다, 이제 적용할 차례에요.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나름의 떨림과 비장함이 겹치는 순간입니다. 켜켜이 쌓여갈 페이지, 그 일부를 장식할 한 자락을 써 내려가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림자
뒤돌아본 삶이 온통 거멓게 멍투성이라면
그건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반증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부족하면 어때요. 잘하고 계세요.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그걸로 충분해요. 저와 같이 본인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려 고군분투하는 모든 학사님들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학생 시절 곁에서 몸소 치열한 삶을 보여주셨던 간사님들과 학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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