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정음]
사과에도 용서에도 용기가 필요해 [폭력 앞에 선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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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1 세 번째 소리 06+07호(통권256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폭력 앞에 선 학생들]
▶ 사과에도 용서에도 용기가 필요해 _ 문현지
▷ 공교육제도 안에서 살펴보는 학교폭력의 의미와 대응 절차 _ 조일육
최근 연예인과 스포츠인이 학창시절에 저지른 학교폭력 사건이 폭로되었습니다.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죠.
비단 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청소년들에게 학교폭력은 가장 가까이에서 겪는 폭력입니다.
청소년 사이에 일어나는 정서적, 언어적, 신체적 폭력은 당사자 뿐 아니라 가족까지 오랜 기간 상처를 입힙니다.
이번에 <소리>는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피해 당사자분들께 깊은 위로와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용기 내어 주신 필자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사과에도 용서에도 용기가 필요해
pixabay.com
◆ 문현지(강원대15)
자연을 사랑하는 낭만주의자.
가구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그림을 그리고있다.
IVFMEDIA에 서 디자인 간사로 일을 하고있다.
그날,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등교를 했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학교 가는 게 싫지 만은 않았다. 오늘은 친구들과 무슨 일이 있을지 조금은 기대되는 등굣길이었다. 복도를 지나 교실로 들어갔고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때, 나를 쳐다보던 친구들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선에 짓눌려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돌아오는 대답은 어색한 인사였다. 그다음 날부터 내가 건네는 인사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따돌림을 당한다는 것을 느꼈다.
반에 왕따가 있으면 그 일을 주도하는 학생이 있다. 주도하는 학생은 반 친구들을 한 명씩 만나서, 타겟을 삼은 사람의 뒷담화와 비난을 한다. 왕따를 시킬 만한 명분이 필요하기라도 하듯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고 외모를 평가한다. 우리 반은 그렇게 왕따가 된 친구가 이미 한 명 있었고 그다음 타겟이 나였다.
먼저 왕따를 당하던 친구는 우리 집 아래층에 살았다. 나는 하교 후에 그 친구를 몰래 만나 같이 밥을 먹고 만화책을 나눠봤다. 나는 그 친구가 그리 싫지 않았는데 학교에서는 가까이하면 친구들이 싫어할까봐 몰래 만나 놀았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나를 배신했다.
나를 배신한 대가로 그 친구는 반 친구들의 무리에 들어갔다. 주도하는 친구를 도와 내가 왕따 당할 만한 이유들을 만들어냈다. “너무 나댄다, 못 생겼다, 냄새가 난다, 뒷담화를 주도했다” 등등.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들이었다. 나는 배신감에 몸부림쳤다. 나를 배신한 친구들이 몹시 미웠다. 내가 왕따를 당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이유도 타인을 혐오하고 소외시키는 일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 누구에게도 그런 자격은 없다.
자존심이 강했던 나는 그날부터 수업시간에는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는 잠을 잤다. ‘나는 괴롭지 않아’라고 말하듯 당당하게 행동하려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재수 없다” 같은 비난과 욕설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학생들까지 왕따 행위에 힘을 보탰다. 내 옷에 슬리퍼를 문지르고 나를 사물함 쪽으로 밀치는 일이 매일 일어났다. 점심시간에는 자연스럽게 혼자서 밥을 먹었다. 반 친구들은 내가 앉은 자리를 피해 멀리 떨어져 앉았다.
4개월 정도를 그렇게 살았다. 그때 내게 가장 상처가 되었던 말은 “냄새난다”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진짜 내게서 냄새가 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를 경멸하고 멸시하기 위한 비난의 언어였다. 그 어떤 말보다 그 말이 더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힘들어서 상담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반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고 너무나 괴롭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마음을 털어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생님이 반 친구들을 불러서 내가 했던 이야기를 빠짐없이 말하고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참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일 먼저는 엄마께 털어놓았다. 왕따 당하고 있었던 상황과 선생님들조차 무시했던 시간들, 괴로웠던 일상을 말했다. 그 말을 들으신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엄마는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 밤을 주무시지 못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더는 이렇게 넘어가지 않겠다”라고 하시며 “너도 더이상은 참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학교가 뒤집혔다.
그날도 다른 날과 똑같았다. 수업시간이었고 반 친구들은 나에게 지우개 가루를 던지고 슬리퍼를 던졌다. 선생님은 모르는 척하는 눈치였다. 나는 책상을 엎었다. 나를 모르는 척하는 선생님을 향한 분노와 괴롭히던 반 친구들을 향한 분노였다. 그리고 “그만하라”라고 소리쳤다. 엄마는 그날 학교에 전화해서 “모든 사실을 알고 있고 더이상 참지 않겠다”라고, “증거를 모아놓고 기다렸고 학교에서 대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교육청에 고발하겠다”라고 선언하셨다. 선생님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학생지도부실(정확한 명칭이 기억나지 않는다)로 갔다.
큰 방에 앉아 진술서를 쓰기 시작했다. 두세 장을 가득 채워 제출했고 나를 괴롭히던 가해자들은 부모님과 함께 학생지도부실로 오게 되었다. 첫날, 가해자들은 나를 보며 우습다는 듯이 “그래서 네가 어쩔 건데?”라고 조롱했지만,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이 지날수록 두려움에 휩싸인 얼굴로 변해갔다. 나흘 정도 지났을 때는 내게 “혹시 내가 또 잘못한 게 있어?”라고 물었다. 어떻게 사건이 마무리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다음 일은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몫이었다. 확실히 기억에 남는 것은 그들이 돌아가면서 나에게 사과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미안한 감정보다는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몇 년이 지나 대학생이 되었다. 그 사건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살았다. 그런데 예상 못한 일이 찾아왔다. 그날따라 갑자기 삶의 모든 게 안정적이라고 느껴졌다. 자기 전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지금의 삶에 너무 만족하고 감사한다. 평생 처음으로 마음이 평안하다”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다음날은 주일이었고 나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갔다. 그리고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친구를 보자마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여긴 내 영역이고 네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나가야 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이 들자마자 그 친구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여긴 내가 있는 곳이니 내 존재를 알았다면 알아서 나가겠지’하는 마음이었다. 그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꽤나 놀란 눈치였다. 당황한 얼굴로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 인사를 반쯤은 끊어내고 “너 여기 다녀?”라고 물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얼마 안 됐다”라고 대답하더니 갑자기 “그때는 내가 미안했어”라고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과에 당황스러웠다. 동시에 그 상처가 여전히 남아서 나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나는 다 잊었어”라고 말했다. 그 또한 자존심이었다.
당당하게 돌아서서는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울었다. 어제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냐고, 겨우 잔잔해진 웅덩이에 왜 또 돌을 던지시냐고 항변했다. 일주일 넘게 하나님을 원망했다. 주일이 돌아왔고 나는 참아내지 못하고 담당 목사님을 찾았다.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고 나는 여전히 그 친구를 보면 너무나 화가 난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천천히 내 이야기를 다 듣고는 말했다. “네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힘들지 상상도 안 된다.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 네가 원한다면 부서를 옮겨줄게. 그런데 그 친구가 아예 교회를 옮기기 바라는 거니? 제안은 해보겠지만, 그 친구가 정말 많이 힘든 상황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또다시 분노에 휩싸였다. ‘그 친구가 힘든 게 뭐 어쩌라고’라는 마음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욕하고 화내고 분노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 친구의 진짜 모습을 밝히고 쫓아내고 싶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마음이 또다시 나를 갉아먹었다. 동시에 ‘그 친구는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을까’ 궁금했다. 그렇게 또 며칠을 보냈다.
분노의 감정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며칠이 지난 후였다. 날 보자마자 미안해하던 눈빛과 당황해 하던 얼굴이 생생히 떠올랐다. 친구들로부터 그 친구가 이후 왕따를 심하게 당했고 원래 다니던 교회에서도 관계가 매우 힘들어 교회를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때 나는 ‘무엇이든 심판의 몫은 내가 아니구나. 하나님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 사람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구나.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함으로써 내 안에 상처를 덮으시려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 시절의 사건 이후 나는 누구를 만나든 적당한 거리를 두며 경계했고, 착한 사람이 되려고, 얌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누군가가 또 나를 미워하진 않을까, 내 외모를 평가하지는 않을까 하는 여러 두려움이 컸다. 사실 내 안에는 어떤 평화도 없었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나기 전날 했던 기도는 그저 내 상황의 편안함이었지 내 마음의 평안함은 아니었다. 그 친구를 용서하는 결단을 내려야만 내가 이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친구를 진정으로 잊고 용서하기로 하나님께 결단했다. 지금도 용서는 진행 중이다.
어쩌면 나는 학교폭력을 당한 사람 중에 해피엔딩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았고 가해자가 그 값을 치르는 일을 보았다. 하지만 상당수의 피해자는 그렇지 못하다. 이 글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용기 내도 된다고, 참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분이고 우리의 고통을 가장 깊이 아신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우리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실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하나님께는 그럴 힘과 능력이 있다.
혹시 피해자의 부모라면 주저 없이 나서주실 것을 부탁하고 싶다. 내가 용기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의 강력한 지지였다. 또 가해자의 부모라면 강력하게 다그칠 것을 부탁하고 싶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 가해자가 있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사과하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고통과 용서의 과정이 지금도 여전히 고통 받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자고, 함께 잘 견뎌 보자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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