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정음]
전파에 실어 보내는 마음, 전파를 타고 흐르는 사랑 [여기에도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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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19 세 번째 소리 06+07호(통권244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여기에도 우리가 있다!]
▷ 하늘을 날며 땅 위의 하나님 나라를 꿈꾸다 _ 임종엽
▷ 빛과 소금으로 살고 싶은 마취과 간호사의 하루 _ 강윤호
▶ 전파에 실어 보내는 마음, 전파를 타고 흐르는 사랑 _ 편유희
▷ 경찰공무원, 특별한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다 _ 양병윤
전파에 실어 보내는 마음, 전파를 타고 흐르는 사랑
내레이션을 녹음하는 필자
◆ 편유희(숭실대03)
마음을 담은 목소리로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들고픈 사람.
현재 두 아이 육아와 삶의 고민들 사이, 그 어디쯤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나운서라는 직업과 만나다
IVF 첫 수련회였다. 그 수련회에서 나는 복음을 새롭게 접하게 되었다. “유희야, 내 사랑을 모르는 이들에게 가서 사랑을 전해주지 않을래?” “네? 하나님, 그런데 저도 잘 모르는데요.” “그 사랑, 내가 네게 알려줄게.” 그분과 마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나도 한 번 뿐인 인생,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아름다운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선교 헌신자’로서 선교의 비전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졸업을 앞둔 4학년 2학기, 졸업 후 단기선교를 나가리라 생각했는데 기도할수록 선교지에 나갈 때가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럼 어떡하지? 한국에서 뭘 하면서 살아야 하나?’ 막막했다. 그래서 내가 그동안 무엇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돌아보았다.
‘언어와 방송’이라는 키워드가 들어왔다. 어려서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동시를 썼다. 조곤조곤 말하는 것도 좋아했고 목소리가 좋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고등학생 때는 방송반 활동을 했는데, 아나운서부가 아닌 기술부였던 내가 녹음 오디션에서 발탁된 적도 있었다. 대학에 와서도 IVF 라디오대학가(이하 라대) 활동도 했다. 라대는 학생 스태프들이 IVF 미디어 간사님들의 도움을 받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만들고 꾸려가는 인터넷방송이다. 전국리더대회 때 라대 광고를 처음 보았다. 가슴이 뛰었다. 이렇게 시작된 라대에서 1년 동안 DJ로 활동했다. 첫 학기에는 음악과 정보를 담은 방송, 두 번째 학기에는 용감하게도 시사프로그램을 담당했다. 특히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육로로 북으로 건너가 남북정상회담을 했을 때 특집 방송을 했던 일이 기억난다. 라대에서 MC와 DJ로 활동하면서 방송프로그램의 ‘입’으로서 진행자 역할을 경험했고, 그 자리가 갖는 영향력과 무게감도 실감했다. 라대에서의 경험과 고민들은 내가 ‘방송 진행자’로서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로서의 ‘방송’을 생각 하며 나는 진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두고 아나운서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기본 호흡, 발성, 발음, 뉴스 리딩, 프로그램 진행 스킬 등의 기초적인 부분을 배우고 스터디그룹을 통해 끊임없이 모니터하고 단련했다. 토익과 한국어 능력시험 등을 준비해서 점수를 땄고, KBS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는 지인의 친구를 만나 실제적인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방송에도 많은 장르가 있지만, 라디오 DJ가 되고 싶었다. 라디오는 목소리를 통해 청취자들과 교감할 수 있는 따뜻한 매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방송국에 지원서를 냈고 그야말로 광탈 (광속 탈락)했다.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과 컵라 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아카데미가 있었던 신촌의 맥도널드에서 3천원짜리 런치세트를 먹으 면서 한숨을 쉬는 날도 많았다. 스스로 아나운서 시험 준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과외, 사무 보조는 물론 공장 알바도 했다. 공장은 교회 집사님이 일하시는 곳이었는데, 로봇에 들어가는 보드에 칩을 꽂고 분류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공장에서 일한다는 게 망설여졌지만,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매우 신성한 일로 다가왔다. 무 엇보다 공장에서는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함께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이 리모컨을 넘겨주신 덕분에 하루 종일 이리저리 주파수를 돌려가며 재미있는 프로 그램을 찾아 들었다. ‘아 이 시간대에는 이런 프로그램을 하는구나’, ‘이런 사람이 이렇게 진행을 하는구나’, ‘이런 채널도 있구나’하며 그때 라디오 공부를 많이 했다. 짧지만 즐거웠던 공장 알바를 마치고 얼마 후 나는 첫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나운서가 되다
첫 방송은 2009년 ‘춘천 MBC’에서 시작했다. 다음 해인 2010년에는 ‘부천타임즈’라는 인터넷 신문사에서 기자 겸 리포터로 짧게 근무했다. 가장 오래 일했던 곳은 경기도 수원 영통에 있는 ‘KFM 경기방송(FM 99.9 Mhz)’인데, 여기에서 5 년을 근무했다. 경기방송에서는 <인천의 발견> 이라는 지역 취재 프로그램을 제작·진행했고, 그 외에도 스폿 광고 녹음, 라디오 콩트의 원고 쓰는 일 등을 했다. 경기방송은 극동방송과 유사하게 1인 방송 체제로 운영되고 있어서, 혼자서 아이템 선정부터 취재, 원고 작성, 편집, 방송까지 하며 라디오 방송 제작 전반을 경험할 수 있었다. 2017년에는 ‘TBN 경인교통방송(FM 100.5 Mhz)’ 주말 <정보세상 인천> 프로그램의 MC로 1년 반 가량 진행했다. 그 외에도 공공기관과 기업행사, 지역축제, 음악회 등의 행사 진행과 다큐, 홍보 영상 등 영상물에 내레이션을 입히는 작업도 꾸준히 했다. 강의는 청소년들에게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소개하는 직업특강으로 시작해 바른 직업관을 알리는 진로특강에도 참여했고, 성인을 대상으로 고용노동부 산하 고용지원센터에서 취업 면접 스피치, 자소서 첨삭 등 취업교육을 하기도 했다.
일이라는 게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기 마련이지만, 방송은 그 특성상 항상 새로운 것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인터뷰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방송을 하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여러 취재 현장에 도 가볼 수 있었다. 경험을 통해 늘 새로운 것을 배웠다. 영종도에 있는 119 소방구조대에서 인명 구조 헬기를 조종하시는 이승열 기장님은 오랜 시간 군에서 전투용 헬기를 조종하시다가 소방 구조대로 오게 되었는데, 이제는 전쟁을 위한 비행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비행을 하게 되어 기쁘다고 했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세월호 사건 직후 세월호 관련 취재를 했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언론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바닥으로 내려가 있던 시기라 방송을 한다는 게 그때만큼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작은 지역 방송국에 몸을 담고 있는 내가 과연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무기력한 마음이 들던 때였다. 당시 인천 지역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던 나는 특집 취재에 들어갔다. 아이들이 세월호를 타고 제주를 향해 출발했던 장소가 바로 인천이었다. 연안여객터미 널로 가는 길에 참 마음이 무겁고 온 몸이 떨렸다. 3회분으로 기획된 특집 방송을 형식적인 내용으로 채우는 게 아니라 듣는 이들로 하여금 이 사건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 구조에 힘썼던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 앞으로의 사건 조사와 진상규명 촉구 등의 마음을 담으려 애썼다. 그날의 구성과 리포팅은 평소 칭찬에 인색하셨던 CP(책임프로듀서) 님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 외에도 수많은 현장에서 수많은 시민들로부터 들은 삶의 이야기는 늘 함께 한 R-09(녹음기의 시리얼 넘버)와 내 가슴 속에 깊이 담겼다.
프리랜서로 살아가다
방송진행자는 몇몇 대형 방송사를 제외하면(심지어 요즘은 대형 방송사도) 프리랜서나 계약직 형태의 비정규직으로 채용이 되기 때문에, ‘타발적 프리랜서’로 방송을 시작하게 된다. 프리랜서로 일하려면 시간 활용 및 자기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하고, 업무에 필요한 공부나 자기 계발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별다른 회사의 가이드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 자비로! 해야 한다. 취재 일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를 운전해서 다녀야 하는데, 하루는 취재를 마치고 방송국에 들어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을 하게 됐다.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 산재 처리를 할 수 없었다. 아픈 몸에 대한 걱정보다 ‘당장 내일 방송은 어떡하지. 방송진행자가 다른 사람으로 완전히 대체되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이 앞서는 나를 보며 서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도 어려움 중 하나다. 방송과 강의로 얻는 수입이 들쭉날쭉해서 어떤 때는 정말 힘든 시기도 있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프리랜서는 일이 고정적이지 않기에 조금 무리가 되고 힘들더라도 일이 있을 때 가능한 한 해내야 하는 부분도 있다. (반대로 직장에 소속되어 있어 할 일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보니, 필요할 때 일을 연결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몸소 경험하기도 했다.) 또한 프리랜서 아나운서는 회당 출연료를 받고 일하기 때문에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하면 나오지 말아야 하는 입장이니, 육아휴직이나 출산휴가 제도가 따로 정해져 있을 리 만무하다. 나도 2015년에 첫째를 출산하면서 1년 3개월의 자체 출산·육아휴직을 하고 나니 돌아갈 자리가 없었다. 앞서 언급한 여러 어려움들을 함께 극복해 나가고자, 최근에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방송진행자들의 협회가 구성돼 권익보호와 정보공유, 네트워크 를 위해 운영되고 있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앞서 말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은 장점도 많다. 한때 방송사에서 풀타임 정규직 제안을 받은 적도 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해서 ‘자발적인 프리랜서’가 되었으니 말이다. 특히 결혼하고 육아를 병행하면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다는 이점이 크다. 내 경우에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평일 낮 시간에 강의를 하고, 녹음을 다녀오고, 주말에만 시간을 내어 DJ로 방송 진행을 했다. 한 곳이나 한 가지 일에만 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일에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내 성향과 잘 맞는 장점이다.
방송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나와 같은 해에 입사해 같은 프로그램 공동 MC로 함께 방송을 해온 선물 같은 동기 아나운서가 있다. 그녀가 어느 날 그런 얘기를 했다. “유희야 신앙을 가지려면 너처럼 하면 좋을 것 같아. 너는 믿는 가치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뭔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감동과 감사가 밀려오기도 했다.
어느 영역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지금 있게 하신 곳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의 뜻을 물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 내 삶에 또 몸담고 있는 영역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본적으로는 내가 맡은 일을 책임감 있고 점점 더 탁월하게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겠고, 다음으로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함께하고 서로 격려하는 일에 마음을 쓰려 한다. 직장동료뿐 아니라 방송으로 만나는 인터뷰 대상자, 출연자, 누구든지 내 삶을 통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그분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내겐 가장 큰 기쁨이고 내 삶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이겠다.
돌이켜보면 방송과 강의는 둘 다 내 안에서 무언 가를 끊임없이 꺼내 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 서 내 안에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학부시절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젠가 꼭 상담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 생각나서 상담 전공을 선택했다. 일과 병행할 수 있는 교육대학원 진학해서 공부했고, 2015년에 졸업 해 마음공부의 첫 걸음을 떼었다. 지금은 두 번째 자체 육아휴직 중이지만 휴직이 끝나면 좀 더 마음공부를 해나가고 싶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표현하며, 보다 나답게 다른 이들과 소통하며 살고 싶다.
말하기와 글쓰기는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는 창구다. 진실한 마음을 담은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말과 방송과 강의 그리고 마음공부 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이 구슬들을 어떻게 꿰어가실지 무척 궁금하고 기대도 된다. 모쪼록 허락된 날까지 마음을 담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마음을, 이 세상을 보다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데 쓰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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