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정음]
나의 길 고양이 [멍멍, 야옹! 우리집 막내]
관련링크
본문
[소리] 2019 네 번째 소리 08+09호(통권245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멍멍, 야옹! 우리집 막내]
▶ 나의 길 고양이 _ 김아롬새미
▷ 사랑한 만큼 슬퍼하고, 그만큼 더 사랑하게 되는 이별 _ 염수현
▷ "더불어 살아감" 반려동물을 맞이하는 기독인의 모습 _ 윤헌영
나의 길 고양이
◆ 김아롬새미(성신여대08)
누산리와 서교동을 가로지르며 그림을 그리는 느림보 그림쟁이
신발장의 작은 실뭉치
평범한 날이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신을 벗는데 작고 여린 소리가 들렸다. “삐약-삐약-.” 신발장 가장 아래 칸에서 노오란 실뭉치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날은 겨울이었고 고양이는 작았다. ‘이렇게 작고 귀엽고 약하고 가여운 나를 두고 혼자 방에 들어가려고 하니?’ 하며 녹색의 유리구슬을 굴려 쳐다본다. 이쯤에서 우리 집의 구조를 설명해야겠다. 넓은 마당과 밭에 나무들이 심겨 있고 낡은 단독주택 두 채를 튼 우리 집은 약간 미로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고양이를 만난 신발장은 현관 밖에 있어서, 바람만 들이치지 않을 뿐 ‘바깥’이라고 보면 된다. 이 신발장 맨 아래 칸의 실뭉치가 나를 보고 있노라니 참 난감했다.
나는 동물에 관심이 많아 그들을 주제로 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만, 먼지, 동물의 털, 공기에 민감한 만성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다. 한 번은 고양이를 내 방으로 데려왔는데 하루도 채 못 지내고 내보내야 했다. 기침과 눈물이 났고, 심지어는 목과 눈이 부어서 현실적인 삶이 불가능했다. 이 노오란 실뭉치는 도대체 우리 집에 어떻게 온 것일까? 나는 ‘우리 집이 고양이의 간택을 받은 진정 한 집사의 집이구나’ 했다. 하지만 범인은 엄마였다. 엄마가 일하는 가게에서 유기묘가 발견되었는데 키울 사람이 없어서, 길고양이를 키우는 옆집 아주머니께 함께 키워 주십사 부탁하려 데려왔단다. 하지만 고양의 생태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원래 키우던 고양이들이 해코지를 할 수도 있어서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그래서 시작되었다. 작은 동네 누산 사거리 제일 끝 집에서, 길고양이와의 기묘한 동거 말이다.
‘모야’라는 맹수
신발장 가장 아래 칸에 터를 잡은 작고 노란 실뭉치는 점점 맹수의 모습으로 자라갔다. 노란 호랑이 줄무늬를 온몸에 두르고 날카롭게 반짝이는 녹색 유리구슬로 모든 움직이는 것들을 맹렬히 노려 보았다. 이름을 짓기로 했다. 조카에게 물어봤다. “선우야, 고양이 이름을 뭐로 지을까?” “모야?” 그 당시 선우는 4살 남짓. 말할 줄 아는 단어가 별로 없었다. 조카의 입에 한참 붙어있던 단어는 “고모, 이거 모야?”였다. 그래서 이름 없던 고양이는 ‘모야’가 되었다. 모야는 온종일 밭에서 놀고 그늘에서 졸다가 내가 마당에 들어서면 나를 맞이했다. 눈가를 찡그리고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미야-” 하고 울었다. 그러면 나는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사랑스러움과 그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은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나는 그와의 성공적인 공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고양이의 생태계와 예방접종 시기, 중성화 수술 같은 것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묘한 존재다. 온몸에 털을 둘렀으면서 추위에 약해 감기에 잘 걸리고 심하면 죽는다. 길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3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번식력이 좋다. 암컷의 자궁이 2개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본능적으로 번식을 하지만 그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한다. 배우면 배울수록 생명은 어렵다. 모야는 아주 작고 귀여운 어린 개냥이로 시작하여 골목 일대를 주름잡는 조폭냥으로 성장했다.
고양이들은 지붕과 지붕 사이를 넘어 다니며 자신의 구역을 지킨다. 구역 싸움은 자칫 목숨을 건 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좋은 구역을 갖는 것은 삶의 터전을 잡는 것과 같기 때문에 삶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엄마가 된 고양이는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격체가 된다. 아이를 가지면 싸움은 더욱 과격해진다. 중성화시기를 놓쳐 모야는 엄마가 되었고 삶을 지켜야 하는 책임감과 본능이 완전히 살아나 한 마리의 맹수로 변했다. 모야는 구역을 지키기 위해 밤마다 지붕을 돌아다니며 다른 고양이들을 쥐 잡듯이 잡았고 결국 승리했다. 아기를 밴 모야를 위해 새로운 집을 꾸며주었다. 창고에 붙어있는 작은 공간을 깨끗이 청소하고 아늑한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며 돌본 결과 5마리 아기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Life And Death
눈을 뜬 꼬물이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했다. 사람 손을 타면 버려질 수도 있다하니 그동안은 궁금해도 꾹꾹 참았다. 확인해보니 대체로 건강한 편이었는데 한 놈은 아주 약해서 꼬리가 휘었고 눈곱이 잔뜩 껴서 눈이 자꾸 감겼다. 나는 이상하게 고놈에게 맘이 쓰여 눈곱이 낄 때마다 눈가를 물 티슈로 살살 닦아주었다. 아기 고양이들은 젖을 떼면 바로 사료를 먹는다. 노파심에 건사료를 물에 불려주기도 하고 영양 많은 습식 간식을 때마다 챙겨 주었다. 아기 고양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눈곱이 더 이상 끼지 않았고 밭을 뛰고 구르며 눈을 반짝였다. 이때까지는 잘 몰랐다. 이별은 항상 불현듯이 찾아온다는 것을.
아직 어린 고양이들은 세상을 잘 모른다. 자동차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게 얼마나 무거운지 말이다.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자동차에 깔렸다. 그 작은 생명체가 얼마나 아팠는지 숨이 끊기기 전까지 파닥거렸다고 한다. 삶이 피고 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우린 부주의했고 어린 생명은 모르는 게 많았다. 마음 한편에 슬픔이 파닥거린다. 그것은 처음 겪는 이별이었고 여운이 긴 상실이었다. 아기 고양이들은 한 번에 많이 태어난다. 그러나 살아남는 것은 소수이다. 나는 고양이에 대해 배웠다. 지식을 쌓지 않으면 상실은 배가 되고 마음에 독이 쌓인다. 남은 3마리의 고양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며 살아가고, 나는 장바구니에 고양이 캔을 채우고 15kg의 사료를 담는다. 캣타워와 장난감도 넣는다. 모야는 또 임신을 했다. 죽음과 삶이 이렇게 맞닿아있다. 우린 또 분만실을 마련했다. 그러던 중 모야의 첫째 아들이 쥐약을 먹고 죽음에 임박해 집으로 들어왔다. 손을 쓸 세가 없었다. 이미 저녁이었고 눈의 초점이 흐렸다. 나는 그저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는 고요히 잠들었다. 길 고양이를 마당에서 키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통제된 케어가 불가능하니 죽음은 도처에 깔려있었다.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새 생명을 맞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졌고 그러면서도 넌더리가 났다. 결국엔 초연해져야 했다. 이입하지 않고 분리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같이 살 수 있는 길이었다.
새로 태어난 고양이들을 분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모야의 중성화를 진행하기로 했다. 서로의 건강을 지키고자 함이었다. 아기를 낳고 젖을 덜 물릴 쯤 시청에 신청했었던 무료 길고양이 중성화 수술을 위해 사람이 왔다. 장성한 고양이 들을 데려가 수술한 다음 회복 기간을 거친 후 다시 데려다준다. 어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기 꼬물이 다섯 마리가 내 방에 왔다. 나의 생존 키트는 마스크와 장갑이었다. 이 어린 삐약이들은 새벽에도 배가 고프면 울었다. 참을 수 없는 소음에 일어나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분유를 탔다. 마침 내 모야가 돌아오고 아기 고양이들이 분양될 집도 정해졌는데, 어제만 해도 살아있던 녀석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일까. 내 손으로 분유를 타 먹였는데.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 아이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 작은 생명을 들어 올렸다. 아직 굳지도 차가워지지도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당 한 구석에 땅을 팠다. 엄마가 다른 아이들을 묻어 주었던 곳이다. 이미 죽음을 많이 보았지만 좀처럼 가라앉지가 않았다. 꼬리가 휘고 눈곱이 많이 끼던 녀석이 내 옆으로 왔다. 박스에 놓인 작은 죽음에 인사를 하듯 한번 냄새를 맡고는 옆에 털썩 앉았다. “미야-”하고 울었다. 나도 울었다. 초연은 개뿔이다. 노오란 실뭉치에 메어준 분홍색 리본을 보며 통곡했다. 우리 집을 거쳐 갔던 모든 고양이들이 떠올랐다. 고양이들이 그루밍(Grooming)을 하며 먹은 실뭉치를 ‘헤어볼’이라고 한다. 고양이들이 건강하기 위해선 헤어볼을 토해내거나 밖으로 배출해야 한다. 내가 그동안 고양이들을 그루밍하며 삼켰던 슬픔이 헤어볼이 되어 토해져 나온 것 같았다.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작은 죽음에 흙을 덮어주었다.
새우는 토냥이
꼬리가 휘고 눈곱이 끼던 그놈은 ‘새우’라고 이름 지었다. 휘어 있는 꼬리가 마치 새우깡 같아서 새우다. 새우는 고양이보다는 강아지에 가깝다. ‘사람=나에게 캔을 주는 착한 동물’로 인식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초면인 사람에게도 배를 까며 ‘내 옥체에 손을 대는 것을 허하노라’ 한다. 취미는 사람들 다리에 몸을 비비며 바지에 털 묻히기다. 엄마와 내가 제일 많이 당하고 제일 질색한다. 동네 아이들에게는 인기 만점이다. 모든 고양이가 아이들을 피해 동서남북으로 도망갈 때 그는 납작 엎드려 아이들의 손길을 기다린다. 나와 조카가 마당에서 놀거나 공터에 가서 놀 때면 어김없이 따라와서 한구석에 앉아 있다.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동네 고양이들에게 맨날 얻어터져서 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불안해 보이는 건지 아님 같이 놀고 싶은 건지 우리를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있다. 그러다 “새우야 가자” 하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앞장을 선다.
하루는 안 그래도 휘어있는 꼬리를 누군가 아작을 내놨다. 보아하니 큰 개에게 물린 것 같았다. 우리 집에는 길고양이뿐만 아니라 말라뮤트(Mala- mute)도 한 마리 살고 있다. 이름은 ‘판다’인데, 잠시 이 녀석을 의심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둘은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판다는 덩치는 크지만 기 본적으로 순해서 가끔 새우가 판다 사료를 먹어도 헤헤거리고 취미 생활인 털 묻히기를 할 때도 그냥 가만히 있어준다. 결국 범인을 찾지 못한 채 새우는 병원에 입원했고 토끼 엉덩이가 되어 돌아왔다. 내가 보기엔 마냥 씁쓸했지만, 새우는 변함이 없었고 꽤 씩씩했다. 뛰어다닐 때도 맹수의 모습 보다는 폴짝이는 토끼 같다. 개냥인 줄 알았는데 토냥이였다. 요즘도 모든 살아있는 동물들에게 호의적인 새우는 어김없이 얻어터진다. 한 놈만 걸려라. 새우 괴롭히면 내가 3대를 멸할 거다. 오래 오래 같이 살고 싶은 살가운 나의 고양이는 아직 잘 머무는 중이다.
먼지
‘먼지’는 아주 특이한 친구인데, 우리 집에 온 정확한 시기가 불분명하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와서 사료를 먹고 있었다. 객식구 주제에 새우랑 아주 영혼의 쌍둥이처럼 지내는 게 웃긴다. 그는 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졌다. 옆집 고양이도 아니었고, 일단 코숏(Korean Shot hair)의 생김새가 아니다. 우리 동네의 길 고양이들은 하나도 빠짐없 이 한국에서 흔한 코숏인데 비해 이 친구는 털이 회색빛이다. 코는 짧은 편에 크고 반짝이는 눈은 선명한 노란색이었다. 믹스묘 같기도 하고 아무튼 묘한 생김새를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지내는 온순한 친구여서 마음에 들었다. 곁을 잘 안 주는 조심성이 아주 많은 먼지는 오직 나에게만 옥체를 허락하는데 나는 캔을 주는 착한 동물이어서 그런 것 같다. 먼지의 목소리는 모기만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는지도 모른다. 새우와 마찬가지로 아직 잘 머무는 중이다.
눈을 한번 깜박
제일 처음 우리 집에 온 모야는 두 번의 출산을 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길고양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무지개다리를 건넜거나 다른 곳에 정착했거나. 그저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많은 고양이들이 스쳐 지나갔고 지금 남은 건 새우와 먼지, 꼬맹이다. 죽기도 하고 집을 나가기도 하고 새로운 녀석이 들어오기도 한다. 지금은 예쁜 점박이 고양이 두 마리도 상주하고 있다. 내가 우리 집 손님을 받을 때 보는 것은 딱 하나다. 새우를 괴롭히느냐 아니면 그 옆에 눕느냐다. 새우가 허락한 고양이는 캔을 먹을 자격이 있다. 한 번이라도 새우에게 카악질을 한다든지 애들에게 해코지를 하는 고양이는 절대로 받지 않는다. 집사에서 주모 정도로 자리매김을 한 나는 오늘도 밥그릇에 사료를 나누어 담고 고양이 캔을 딴다. 각자의 양을 배분하고 자리를 잠깐 비켜주면 새우와 먼지, 꼬맹이는 맹렬히 달려들어 먹지만 새로운 점박이 친구들은 눈치만 볼뿐이다. 그러면 그와 시선을 맞추고 눈을 한번 깜박한다. 그도 깜박한다.
우리 집에 잘 왔어. 잘 먹고 잘 자다가, 원하는 만큼 살다 가시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