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정음]
사랑한 만큼 슬퍼하고, 그만큼 더 사랑하게 되는 이별
관련링크
본문
[소리] 2019 네 번째 소리 08+09호(통권245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멍멍, 야옹! 우리집 막내]
▶ 사랑한 만큼 슬퍼하고, 그만큼 더 사랑하게 되는 이별 _ 염수현
▷ "더불어 살아감" 반려동물을 맞이하는 기독인의 모습 _ 윤헌영
사랑한 만큼 슬퍼하고, 그만큼 더 사랑하게 되는 이별
동물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른 페퍼의 모습
◆ 염수현(경희대08)
팍팍한 세상, 소풍 온듯 가볍고 재밌고 따뜻하게 살다가고 싶은 사람
가끔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혹은 키워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항상 “키워본 적이 없다”라고 대답한다. 나에게 있어 이 대답은 진심을 담은 ‘거짓말’이다. 두 마리의 오리, 두 마리의 새, 두 마리의 강아지, 세 마리의 자라, 네댓 마리의 병아리, 두 마리의 누에, 수십 마리의 물고기. 내가 자라는 동안 짧게 혹은 길게 우리 집을 거쳐 간 동물들이다. 독립하기 전에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에서는 엄마가 한 마리의 강아지를 기르고 있고, 지금의 집에서는 룸메이트가 키우던 페럿(가 축용 또는 가정의 반려동물로 길든 긴 털 족제비 의 일종-편집자 주)과 약 일 년 정도의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이러니 반려동물과 함께해본 적이 없다는 말은 분명 거짓말이다.
나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동물들을 ‘내가’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렸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정서적으로 그 동물들과 교감하고 마음을 나누어 본 기억도 없다. 엄마가 기르던 새나 물고기도, 관찰 숙제 때문에 몇 달을 길러 번데기가 됐던 누에도, 동생이 학교 앞에서 사와 며칠 만에 별나라로 갔던 병아리도 그랬다. 눈에 보일 땐 예뻐했지만 정말 내 가족으로 마음을 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겁이 났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 우리 집에 온 첫 동물은 어린 오리 두 마리였다. 아빠가 어디선가 데려오신 작은 오리들은 유치원에 다니는 내게 퍽 신기하고 귀여워 보였다. 아빠가 그 오리들을 어디서 왜 데려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 내게 선물이라며 주셨고 나는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서식지를 떠나 도시 한가운데 있는 아파트에 살게 된 오리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두 마리의 어린 동물은 오리가 어떤 환경에서 사는지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가족에게 왔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에 보니 상자 안 작은 물통에 기댄 채 죽어있었다. 너무 놀란 나는 엄마가 죽은 오리들과 집을 정리하는 내내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따라다니며 목 놓아 울었다. “아빠가 데려오지 않았으면 오리들이 죽지 않았을 거”라며 “아빠는 그 오리들을 왜 우리 집으로 데려왔느냐”는 원망의 말을 반복했던 먹먹한 감정이 지금도 선명하다.
작은 오리들과의 일은 어린 시절의 내가 겪은 첫 이별이고 첫 상실이었다. 단 며칠간의 동거였지만 함께 시간을 보낸 존재가 더는 숨을 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꽤 큰 충격이었다. 이후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오리를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심장이 조이듯 아프다. 아마 이 사건 후로 ‘동물을 집에 데려와 키우면 괴롭히다 결국 죽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박혔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동물을 기르고 싶지 않았고, 집에 왔던 동물들을 대할 때도 ‘내가 키운다’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줄 수 없었다. 어떠한 준비도 없이 맞닥뜨렸던 그 사건의 상처가 수습되지 못한 채 가슴 한구석에 남아 나를 동물들에게서 한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렇게 동물 앞에서 뒷걸음만 치고 있었는데 룸메이트가 집에 페럿을 데리고 왔다. 만화에서나 봤던 조금은 특이한 그 동물을 집에 데려오는 데에는 별 고민 없이 동의했지만, 이때도 아마 함께 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페럿의 집은 건너편 룸메의 방에 있었고 그 녀석이 방밖으로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녀석이 내 방에 들어왔던 일은 겨우 두어 번이나 될까. 일 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을 한 지붕 아래 있었지만 그 시간이 무색할 만큼 함께한 기억은 많지 않다. 그렇게 녀석과 데면데면했던 내가 지금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내가 지켜본, 조금은 달랐던 녀석과의 이별을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 룸메와 만나면서 페퍼라는 새 이름을 얻은 녀석은 처음 왔을 때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페럿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전 주인이 페럿에게 좋지 않은 환경을 제공하고 오래 방치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이리저리 뛰고 오르기를 좋아하는 야행성의 페럿을 케이지 안에 가두고는 형광등 아래서 계속 생활하게 했다고 한다. 운동을 하지 못한 다리는 매우 약해져 있었고 이는 음식을 씹어 삼키지 못할 정도로 녹아 있었다. 그렇게 힘겨운 시간을 보낸 녀석을 데려온 룸메는 그 녀석에게 마음을 많이 쏟았다. 이색동물에 속하는지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많지 않아 녀석을 데리고 멀리 있는 병원을 다녔고(페럿 진료가 가능한 병원은 서울에 단 두 곳, 지방에는 그마저도 거의 없다고 한다) 케이지 안뿐 아니라 방 곳곳에 페럿이 좋아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 두었다.
태어나 3년 반 만에 좁은 철장을 벗어난 녀석은 그렇게 조금씩 나은 생활을 하는 듯 보였다. 문제는 갑자기 일어났다. 잘 지내던 녀석이 경련을 하며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진찰 결과는 저혈당 쇼크였다. 야행성 동물인 페럿이 너무 오래 빛에 노출된 채 살아온 탓에 생체리듬이 다 깨졌는데, 이를 회복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때부터 룸메는 녀석에게 4~6시간마다 급식을 하고 12시간에 한 번씩 투약을 했다. 새벽에도 자다가 일어나 밥을 먹여야 했고 약 시간을 맞추느라 짧은 외출조차도 생각하기 어려운 생활이 이어졌다.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늘 피곤을 짊어지고 다니면서도 룸메는 “평생 이래도 좋으니 더 나빠지지만 말고 같이 있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새벽에 밥을 먹지 않던 녀석이 먼저 밥을 달라고 깨우러 오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와 귀염을 떤다고 했다. 그렇게 나누는 교감만으로 너무 소중하니 이대로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이전 주인과의 생활에서 얻은 짐을 벗을 수가 없었는지 녀석의 상태는 더 나빠졌다. 룸메에게 온 지 10개월이 되었을 무렵 정기검진 중 종양이 발견되었다. 그냥 두면 채 반년을 넘기기 힘들 수도 있다고 했다. 그냥 그대로 몇 개월 만이라도 함께 보낼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수술을 해 볼 것인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수술비용도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 녀석이 수술을 이겨 내고 회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룸메는 수술을 결심했다. 어려운 수술을 받은 녀석은 수술 직후엔 잘 회복하는 듯 보였고 무사히 퇴원했다. 그러나 녀석은 이튿날부터 다른 부작용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수술 후 열흘 만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마지막 입원을 하기 전날 밤에는 나도 룸메와 함께 녀석을 보듬고 열을 식혀주며 늦은 시간까지 곁을 지켰다. 그리고 날이 밝자 출근하는 룸메를 대신해 녀석을 입원을 시키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지하철과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병원에 가는 동안 몇 번이고 이동장 안을 살피며 녀석을 확인했다. 꼭 나아서 집에 가자며 몇 번이고 말을 걸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수액을 맞히는 동안, 좋아하는 담요에 둘둘 말린 녀석을 몇 시간쯤 품에 안아 들고 있었다. 아마 그때가 내가 그 녀석과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낸 때였을 것이다. 몇 번이고 슬쩍 들어 올려 뻗대다가 이내 툭 떨구고 말던 작고 가느다란 손을 살살 만져주었다. 가만히 얼러주면 슬쩍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왔다. 수액을 다 맞은 후 입원치료실로 들어가는 녀석을 보면서도 그게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 급히 일을 마치고 달려왔던 룸메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녀석은 결국 다음다음 날, 퇴근 후 면회를 하러 갈 룸메를 채 기다리지 못하고 떠났다. 나아서 돌아오자며 내 품에 안겨 집을 나섰던 녀석은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내 생전 처음 방문해 본 동물병원에서의 시간이 녀석과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으로 남았다.
곁에서 지켜본 동물의 사후 처리는 더 힘들었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동물의 사체를 매장할 수 없다. 쓰레기로 처리하게 되어 있다. 가족처럼 곁에 두었던 동물을 말 그대로 ‘폐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룸메는 페퍼를 보내기 위해 그날 저녁 동물 화장터를 찾았다. 국내에 몇 곳 되지 않는 동물 화장시설은 그나마 수도권인 경기도 외곽에 있었다. 어렵게 찾은 화장터에서 화장을 마친 페퍼는 작은 유골함에 담겼다. 이를 지켜보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길렀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할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별은 나에게도 꽤 아팠다. 일하던 중 룸메에게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이명이 생기고 복통이 일었다. 심한 충격이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곧잘 겪는 증상이었다. 나는 감정적인 흔들림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편인데, 이런 증상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곁에서 지켜본 내가 그랬을진대 작은 녀석의 1차 보호자였던 룸메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 시기를 함께 보내면서 알게 된 것이 ‘펫로스 증후군’이다. 반려동물의 사망을 겪은 반려인이 겪는 우울을 비롯한 일련의 증상들을 이르는 말이다. 설명에 따르면 반려동물을 잃은 보호자는 아이를 잃은 보호자가 겪는 것과 매우 비슷한 심적 스트레스 양상을 보인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반려동물과의 헤어짐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으며 동물 반려인들의 상실감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을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동물 반려인 천만 시대라고 하는 요즘, 내가 동물 반려인이 아 니더라도 가까이에서 동물을 기르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동물 반려인들은 모두 언젠가 반려동물과의 이별을 겪게 될 것이다. 그때 동물 반려인은,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은 이별을 어떻게 겪어내야 할까? 정답이 없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음’이 주는 상실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것은 없을 테니까.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내가 가장 통감했던 부분은 우리는 상실을 겪은 동물 반려인들에게 조 금 더 섬세한 위로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몇 달간이나 깊은 우울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룸메에게 사람들은 “그만 잊으라”고, “그냥 동물일 뿐이라”고 위로를 가장한 충고를 쉽게 던졌다. 심지어 동물은 영혼이 없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쏟으며 교감한 상대를 잃은 사람에게 잔인한 말이지 않은가. 생각 없이 던진 주변인들의 말은 사랑하는 동물을 보낸 슬픔을 더 깊고 아프게 했다.
내가 겪은 두 번의 죽음은 조금은 결이 다른 사건이다. 하지만 그 상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같다. 오리를 보내야 했던 어린 나에게 엄마가 그 오리들을 쓰레기봉투에 담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그만 울라고 다그치는 대신, 조금 더 조심스러운 행동과 말을 보여주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파하거나 막연히 동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지 않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페퍼를 잃은 룸메에게 필요 했던 것은 어서 잊고 정리하라는 충고가 아닌 그 슬픔을 공감해주는 말들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공동체를 말하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과연 예수님이라면 그런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 무어라 말씀하실까?’라는 매우 쉽지만 어려운 생각을 해봤으면 한다.
반려동물의 죽음이 반려인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 상처에 상처를 더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존재든 죽음은 충분히 애도해야 한다. 빨리 잊고 덮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사랑했던 존재를 잃은 슬픔을 존중하고, 깊은 상심을 느낄 만큼 사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에 동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반려인 자신도, 그 곁에 선 사람도 슬픔을 잊으라고 다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잊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조금 숨을 고르면 그 이별의 순간은 사랑한 만큼 슬퍼하고 그만큼 더 사랑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