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정음]
'병 주고 약 주는' 나의 학생들 [응답하라,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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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정음]
'병 주고 약 주는' 나의 학생들 (응답하라, 캠퍼스!)
[소리] 2021 첫 번째 소리 02+03호(통권254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응답하라, 캠퍼스!]
▶ '병 주고 약 주는' 나의 학생들 _ 김은숙
▷ 20학번 새내기, 파란만장했던 한 해를 돌아보며 _ 이지민
▷ 코로나 시대, 캠퍼스 사역 어떻게 할까? _ 김혁수
'병 주고 약 주는' 나의 학생들
전북지방 주제별 방중강의 '무명의 여성 그리스도인' (필자는 맨 오른쪽)
◆ 김은숙(전북대12)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고 싶으나 ‘바람 잘 날 없이 매번 흔들리는’ 간사.
이 흔들림이 어제보다 오늘, 좀 더 뿌리를 단단하게 해 줄 것이라 믿으며 학생들과 함께하고 있다.
우석대와 전북대를 담당한다.
“1차 임기를 마무리할 때, 다른 건 몰라도 간사로 살아가는 기쁨, 간사로 살아가는 보람을 알고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간사 훈련을 수료하고 새내기 간사로 첫발을 내딛던 무렵의 나의 소원, 나름의 원대한 포부였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올해로 1차 임기를 마무리하는 3년차 간사가 되었다. 그동안 다양한 학생들을 만났다. 공동체에 잘 안착하여 함께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는 학생들부터 아쉽게도 공동체 연결까지는 이어지지 못한 일회성 만남까지, 그간 참 많은 이들을 만났다.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 이들과의 첫 만남은 언제나 긴장된다는 것, 그리고 둘째, 누구나 저마다의 모습으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매우 바쁘다. 너도나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가까이서 본 학생들의 모습은 때로 의아하다. 연애에 몰두한 학생, 운동이나 베이킹 등 자기의 취미를 즐기는 학생, 인스타 맛집을 투어하는 학생, 게임에 푹 빠진 학생 등등. 하여,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얘네들이 바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바쁘다’라는 말 대신 우리 학생들을 표현해줄 좀 더 적절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학생들의 삶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여기, 내가 만난 3명의 학생을 간략히 소개한다. 각기 다른 친구들의 삶을 읽으며 우리 학생들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같이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다.
공무원 수험생 A
A는 애초에 대학에 올 생각이 없었다. 밝고 성실하고 호기심 많은 A는 알바, 공동체, 학업, 교회, 심지어 노는 것에까지 무엇이든 열심이었다. 그런 그의 밝은 에너지는 우리에게 전이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A는 매우 미안하고 곤란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이제 휴학하고 본격적으로 공무원 시험에 집중해볼 생각”이라고. 그것이 학창시절부터 A가 가진 꿈이자 목표였다는 것을 알기에 나도 함께하는 동료 간사님도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A를 격려하며 헤어졌다. 그후 수 개월 뒤, A와 원투원을 했다. “간사님~~”하며 품에 안기는 A는 여전했지만, 왠지 얼굴이 많이 상해 보였다. 온라인 스터디원들과 공부 시간을 인증하며 온종일 책상에 앉아 보내는 A에게, 많은 걸 포기하고 매일 책상에 자기 자신을 끌고 가야 만 하는 A에게, 나는 그날도 격려 외에는 다른 것을 건네줄 수 없었다. 원투원 이후 채 일주일이 지 나지 않아 A에게 카톡이 왔다. “간사님이 격려해 주셔서 마음을 잡아보려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이 지친 것 같아요. 시간이 필요합니다.”
졸업이 어려운 졸업반 B
B에게 졸업은 유독 어렵다. 졸업 시험도, 졸업을 위한 영어 성적 취득도, 이수 학점을 채우기 위해 시간표 짜는 것까지, 어느 하나 쉽지 않다. B는 시작이 두렵다. ‘졸업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어쩌지? 영어 점수를 맞출 수 있을까?’처럼, 결과를 충족시키지 못할 게 두렵고 한 번 더 자존감에 타격을 입을 게 두려워,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어둔다. 다행히 올 겨울 B는 미루어왔던 졸업 요건 하나를 클리어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B가 대견해서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졸업 요건을 채우기 위해 한 학기를 휴학한 채 억지로 자신을 어딘가에 끼워 맞춰야 하는 B의 현실에 마음 한편이 씁쓸하다. 4년을 꼬박 성실하게 학교에 다녔어도 취업은커녕 졸업장 하나 따기 어려운 현실이라니….
가장 바쁘게 살아가는 아이 C
C는 대학 생활 내내 알바를 쉬어본 적이 없다. 쉬기는커녕 동시에 여러 알바를 병행하기도 했다. 에너지 많은 C의 성향이 한몫 거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C는 형편상 알바를 쉴 수 없다. C가 짊어진 장녀의 무게는 유난히 무겁다. 가족을 돌보는, 때로는 책임지는 것처럼 보이는 C이지만 학과에서, 교회에서, 공동체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C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C를 안 지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C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학업에, 학과 임원에, 교회 봉사에, 공동체 섬김, 알바까지 도맡고 있는 C가 기이해 보이기까지 했다. C의 바쁜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C는 하나님 앞에서 점점 자라갔다. 말씀을 듣고 반응하고, 때로는 짐을 내려놓고 쉬어가기도, 그래서 더 좋은 힘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고 섬겼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C는 스스로도 낯선 ‘바쁘지 않은’ 휴학 생활을 보낼 예정이다. 졸업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공무원 시험 준비에 올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A, B, C가 모든 학생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분명 현재 학생들의 상황을 어느 정도 대변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들의 삶에 ‘바쁨’이라 는 말 대신 어떤 언어를 붙일 수 있을까? 나는 ‘쫓김’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학생들은 바쁘게,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그것은 쫓김에 의한 나아감, 자발적이라기보다 여타 상황에 의한 나아감일 때가 많다.
세상은 어디로, 무엇을 향해, 무엇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고민할 틈을 주지 않고 두려움을 심어준 채 그대로 밀어붙인다. 분주한 학생들과 신입학사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치열하고 안쓰럽고 도리어 나를 뒤흔들어 놓는다. 간사라는 멋들어진 이름으로 그들과 함께하고 있지만, 실은 나는 그들보다 나이도, 삶의 지혜도, 신앙의 연륜도 그다지 지긋하지 않은 평범한 한 명의 청년이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면 ‘나, 이대로 괜찮나?’ 하는 생각이 든다. 버스에 앉아 이런저런 자격증과 취업 자리를 기웃거리다가 이내 화면을 꺼버리곤 했다. 그러고 나면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학생들을 향한 미안함과 함께 또 하나의 질문에 맞닥뜨린다. ‘대체 언제쯤이면 흔들리지 않을까? 흔들리는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동력을 끌어올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흔들어 놓았던 학생들이 동시에 나의 동력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꼿꼿하기보다 흔들려서 위태로워 보였던 내 모습 역시 학생들에게 동력이 되어주었다는 사실도 발견한다. 이제 여기, 전혀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지만 서로를 빛으로 안내한 살아있는 동력들을 소개한다.
H 이야기
H는 교회 선배들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다. 감사함과 빚진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과 갈망에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H를 알고 있던 선배 간사님을 통해 H는 우리 공동체와 만나게 되었고, 나는 H와 8주간 일대일 도제 훈련을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가까이서 H와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은 내겐 정말로 행운이었다. 말씀 한 구절, 질문 하나에 골똘히 생각하고 차분히 말을 이어가던 H는 그 모습만으로 내게 가르침을 주었고, 깨우침을 주었고, 부끄러움과 돌이킴의 계기를 주기도 했다. 매주 화요일 H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누군가 풍선을 불어준 것처럼, 새로운 바람이 마음 가득히 나를 채웠다. 현실이 어떻든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소망하는 서로를 통해 숨어있던 우리의 갈망을 재확인하고, 나아갈 바를 향해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 시간이 나와 H를 살게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는 이들에게로 흘러갔다. 방구석에서의 ‘줌투원(줌으로 하는 원투원)’이 익숙해진 요즘, 가끔씩 H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드렸던 짧은 기도와 설렘이 그립다.
리더모임 이야기
2020년 2학기, 리더들과 두 권의 책을 읽었고 두 편의 글을 썼다. 보다 정돈된, 보다 깊이 있는 나눔을 위해, 그리고 약간의 시간 단축을 위해 시도한 글쓰기가 그 어느 때보다 진솔하고 끈끈한 유대감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다시 춤출 때까지』(월터 브루그만, IVP)와『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헨리 나우웬, IVP)를 읽고 글을 썼는데, 각자가 헨리 나우웬이 되어 글을 써보았던 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누구는 헨리 나우웬처럼 하나님을 소개하는 글을 썼고, 누구는 하나님 사랑을 알지만 정작 알지 못하는 것만 같은, 그런 내면의 씨름을 주님께 편지로 적었다. 누구는 지난 삶 가운데 함께하셨던 주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앞으로의 다짐과 믿음의 고백을 적었다. 각자 글을 낭독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학생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고백을 한 자 한 자 이어갔고 눈물과 농담을 섞어가며 서로를 격려했다. 이런 난리법석(?)의 시간이 방구석 1열(컴퓨터 앞)에서 리더모임에 참여한 우리를 어느 때보다 강하게 엮어주었다고 믿는다.
학생들의 ‘쫓김’과 ‘불안함’이 우르르 내게 쏟아질 때, 그 불안과 두려움이 내게서 동일하게 발견될 때, 그로부터 나를 꺼내줬던 건 나 홀로의 기도도, 묵상도, 설교 준비도, 쉼도 아니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나의 뿌리가 되어주고 자양분이 되어주었겠으나 결국은 정신없이 앞을 향해 달리는 학생들, 그래서 때로는 멀어지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학생들, 그러나 바른길을 찾아서, 진리를 찾아서, 사랑을 찾아서 다시금 모험을 떠나는 학생들이 흔들리는 나를 진정시켰고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주었다.
지친 학생들에게 건넬 수 있는 게 고작 공허한 격려 몇 마디밖에 없다고 느껴질 때면 무력감에 빠진다. 때로는 위로와 격려 말고 담대하게 학생들을 도전하며 손 내밀고 싶지만, 같이 흔들리는 마당에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삼키기도 했다. 하지만 흔들리고, 심지어 때로는 도망가지만, 다시 돌아와 우리의 뿌리를 찾곤 하는 ‘못난 이’들을 통해 주님은 우리의 바람을 잠잠하게 하시고 주님의 리듬을 타게 하신다. ‘못난 이’를 ‘못난 이(♥)’들을 통해 자라가게 하시는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나를 일으켜준 학생의 편지에 적힌 구절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간사님, ‘내 안에 말씀에 대한 생명이 없는데, 이 말씀을 생명이라고 전하고 있는 내가 힘들다’고 나눔하셨던 거 말이에요. 저는 사역을 계획하고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고 씨름해가는 그 모든 과정이, 곧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주려는 마음이므로, 그게 우리 안에 여전히 생명이 남아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그 문제에 대해 충분히 씨름하고 고민했다면, 또 생명이 없음을 알고 힘들어했다면, 그 진실한 고민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기뻐하시고 학생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듣는 마음을 부어주실 거예요. 간사님, 언제나 생명력 넘치는 말씀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적고 보니 간사를 시작할 때 했던 나의 다짐, 간사로서의 보람을 알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다행히도 쓸쓸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바쁘고 갈피를 잡지 못해 제멋대로인 학생들로 인한 속앓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나에게 기쁨과 보람을 알게 해주었고 하나님 나라 소망을 단디(!) 잡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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